[한경에세이] 크세주, 대화와 협력의 씨앗

입력 2020-02-26 18:10   수정 2020-02-27 00:04

몽테뉴의 ‘크세주(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는 혁명이다. 종교 갈등의 한복판에 내리꽂힌 그의 도저한 회의주의는 근대 합리주의의 문을 열었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은 극단적인 자기 탐구를 방편으로 중세적 미몽의 최후를 다그쳤다.

나라가 시끄럽다. 코로나19의 광풍 아래에서도 정치권은 해법을 찾기보다 감정적 대립에만 골몰하는 듯하다. 성별·세대 간 갈등이 야기할 암울한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아집으로 무장한 새로운 전선들이 형성된다. 총선이 임박했지만 진영 논리와 정치 공학이 어지럽게 부딪힐 뿐 조화로운 사회 발전을 위한 혁신적인 대안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본래 소란스러운 제도 혹은 인식과 행동의 양태다. 문제 해결의 방식으로 대화와 타협을 택했으니 당연하다. 다양한 정체성과 주장의 자유로운 경쟁은 다수의 승리와 소수의 수용이 평화롭게 조우할 근거를 제공한다. 누구도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다는 상대주의적 합리성은 민주주의 발전의 기본 정신이다.

진짜 문제는 민주주의의 발걸음이 공동의 비전과 유리될 때 발생한다. 맹목의 공간에서 민주주의는 길을 잃는다. 화합의 가능성보다 완전한 승리만을 갈구할 때 모두는 서로에게 절멸해야 할 적으로 나타난다. 폭력이 앞서고, 약자와 소수에 대한 배려는 자리를 잃는다. 증오와 원망, 원한과 복수의 악순환 속에 사회 활력이 소진된다. 이론이 아닌 현실이자, 절박한 과제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몽테뉴의 단순한 질문은 공감과 협력의 씨앗인 상대주의적 인식의 초석을 놓았다. 완벽한 존재는 없다는 깨달음이 대화와 이해의 문을 넓힌다. 혼자 있을 때 더욱 삼가라고 가르친 도산의 정신은 자기 수양을 넘어 잃어버린 나라와 민족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나아갔다. 끊임없이 반성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이룰 수 없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발전은 더뎠지만 큰선비를 많이 배출한 자부심은 컸다. 동네 할아버지는 꼬마들이 어느 집 아이인지 다 알아서, 인사할 때마다 집안 안부를 물었다. 어른들은 가끔 다퉜지만 부침개에 막걸리 몇 잔이면 이내 형님아우로 돌아갔다. 오래된 마을이라 언제까지고 함께 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두 달이나 지면을 차지했다. 보잘것없는 생각의 편린을 두서없이 내놓아 민망할 따름이지만, 누군가 잠시나마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겨울의 끝자락이 전염병의 공포마저 말끔히 씻어내길, 조금은 더 희망찬 봄날에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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