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균일하지 않다. 2020년 같은 시기를 사는 지구상에는 수렵·채집, 농경, 봉건, 근대, 현대 사회가 지리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한국같이 크지 않은 나라에서도 한쪽에서는 4차 산업혁명과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외치지만, 다른 한쪽에는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도 반(反)지성주의, 포퓰리즘, 파시즘의 징후가 한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어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정책 실수를 교정하는 데도 시간과 노력이 낭비되고 있다. 그래도 과학적 의사결정 절차가 정부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온 국민이 체감하게 된 것은 다행이다.
경제·기술인들도 예상치 못한 사회 현상과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 현상으로 인해 주의가 흐트러지는 상황이다. 어떤 이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역시 기술이니, 기술·경제인에게는 기회라고 주장한다. 역병이 창궐하니 원격근무 관련 기술이 더 많이 퍼질 것이고, 전자상거래는 더 확대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2007년 출간된 《모빌리티》의 저자 존 어리는 “대면 만남은 에밀 뒤르켐이 말한 ‘흥분(effervescence)’이라는 것을 발생시키며, 사회 생활의 많은 부분과 여행에 대한 요구 및 의무는 대면 대화나 때로는 신체를 맞댄 대화가 갖는 즐거움과 매력에서 발생한다”고 갈파했다. 4차 산업혁명에 의해서 ‘이동성(mobility)’은 없어질까? 그렇지 않다. 인간의 이동성 자유는 계속적으로 커질 것이다. 이는 신(神)의 특성 중 하나인 무소부재(無所不在)를 의미하며, 이는 하라리가 말한 인간의 새로운 욕망 중 하나다.
지난 2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인공지능학회(AAAI)에서 중국 교육부와 베이징대, 베이징대병원은 환자에게서 수집한 시계열 데이터를 인공지능 딥러닝 기법으로 분석, 환자의 건강이 언제 급격히 나빠질지를 시간 단위로 예측하는 방법론에 대해 발표했다. 홍콩이공대(홍콩폴리테크닉대)는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동시에 기업의 데이터 처리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각종 에지컴퓨팅 장치에서 들어오는 최소한의 데이터로 기계학습하는 방법론을 발표했다.
지난 1월 삼성전자는 비침습식 혈당 측정법 논문을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했다. 가까운 미래에 스마트폰 카메라만으로도 혈당 수치를 측정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런 방법론들이 결합되면 인간의 수명은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측정이 가능해지면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가 되면 통신으로 공유되고, 그 데이터는 인공지능에 의해 학습돼 새로운 정보와 판단을 목적에 맞게 생산할 수 있다. 불과 200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시각을 데이터화하지 못했지만 카메라와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가능해졌고, 청각도 에디슨의 축음 기술과 디지털 기술로 데이터화됐다. 인공지능에 의한 새로운 측정 방법의 등장 그리고 측정을 통해 데이터화된 것이 통신으로 공유되고 다시 인공지능에 의해 분석돼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어쩌면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류는 여전히 역병과 기근,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멸, 행복, 신성에 대한 새로운 꿈을 꾼다. 그런 진보와 발전의 꿈은 늘 좌절되고 생각보다 느리게 진행된다. 사회적으로도 이미 없어졌을 것 같은 봉건성, 비이성, 비과학성,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함이 반복된다. 이처럼 인류는 늘 문제를 갖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계속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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