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잭 웰치와 정주영의 팔씨름

입력 2020-03-03 18:33   수정 2020-03-04 00:14

잭 웰치가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1983년이었다.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방문해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의 합작 파트너가 돼 달라고 부탁했다. 웰치는 전자에 문외한인 정 회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GE에는 기술이 있지만 현대엔 뭐가 있나요?” “노동력이 있습니다.” “값싼 인력은 중국에도 널려 있어요.”

계속되는 냉대에 화가 난 정 회장은 욕설을 내뱉고 자리를 박찼다. 웰치는 잠시 생각하다가 정 회장을 불렀다. “전자는 초보 아닙니까?” “자동차와 배에 이어 전자도 곧 따라잡을 거요.” 이때 정 회장이 대뜸 팔씨름을 제안했다. “당신이 지면 부탁을 들어주시오.” 골프 핸디캡이 ‘0’일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에 스무 살이나 젊은 웰치는 이에 응했다. 결과는 뜻밖에도 정 회장의 승리였다.

웰치의 지원에 힘입어 현대전자는 세계적인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후 웰치는 틈만 나면 팔씨름 얘기를 했다. 외환위기 때도 “팔씨름 이기고 GE와 합작투자법인을 세운 정 회장 같은 사람이 많아서 한국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웰치는 정 회장처럼 ‘불도저식 경영’으로 이름을 날렸다. 25세 때 엔지니어로 입사해 46세에 회장이 된 그는 “1등만 살아남는다”며 직원 41만 명 중 11만 명을 잘라 ‘중성자탄 잭’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20년간 GE의 연매출을 250억달러에서 1300억달러로 4배 이상 늘렸고, 시가총액은 30배 키웠다.

그는 인재를 중시해 “한 손에 물, 한 손에 비료를 들고 꽃(인재)을 키우는 게 내 사명”이라고 말했다. 2009년 한국경제신문사 주최 글로벌인재포럼에서는 ‘4E+1P’를 강조했다. 스스로의 에너지(energy)와 이를 전파하는 에너자이저(energizer), 어려운 결단을 내리는 에지(edge),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엑시큐트(execute), 열정(passion)이 그것이다.

은퇴 후 경영대학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던 그는 《잭 웰치의 마지막 강의》에서 “이젠 ‘불도저 리더’보다 ‘관대한 리더’가 필요한 시대”라며 “창의적인 직원에게 자유를 많이 주라”고 권했다.

철도기관사 아들로 태어나 ‘세기의 경영자’와 ‘중성자탄’이라는 평가를 함께 받은 그가 어제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먼저 간 정주영 회장이 하늘에서 그를 만나면 이번엔 또 어떤 걸 놓고 팔씨름을 한 판 하자고 할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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