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대한민국에게 어떤 나라이며, 한국은 중국과 어떤 관계로 나아가는 게 바람직한가. 이른바 ‘사드 보복’에 이어 중국 우한발(發) ‘코로나 전염병’ 확산을 계기로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안으로 역대급의 전염병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판이지만, 한국은 이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나가며 답을 찾아야 한다. ‘중국과의 관계 설정’이라는 문제로부터 도피해서는 안 된다.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어이없고 기가 막힌다. 최근 열흘 여 사이에 중국에서는 적반하장 격의 부당한 대우와 수모가 적지 않았다. 인천시에 방역 마스크 지원을 요청해 2만 개를 받아간 웨이하이(威海)시 공항당국이 인천발 제주항공 승객 167명에 대해 과잉검역과 함께 격리조치를 한 게 국내로 알려지기로는 시작이었다. 이후 ‘한국 경계, 한국 격리’는 중국 각지에서 비슷하게 되풀이 됐다. 아파트 단지 같은 공동주택에서는 모멸적인 한국인 차별과 위협적 차단까지 있었다. 거의 조롱조인 중국 언론의 전염병관련 한국보도는 또 어떠했나. 비슷비슷한 일들이 많아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끝도 없다. 이런 일을 하나하나 다시 옮기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못된다.
나라 안팎의 소식이 워낙 빠르게 이동하는 시대, 한국인들이라면 이미 웬만큼은 알고도 있을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이런 일이 ‘중앙 정부’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지만,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는 한국인도 그다지 많지 않다. 공산당과 정부가 강하게 통제하는 중국의 체제와 특성이 중국 밖에서도 어느 정도 실상대로 알려져 있다는 얘기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조치를 놓고 중국 욕만 하고 원망이나 할 일일까. 제3자 시각에서 보면 전염병과 사투를 벌여온 중국 처지도 그만큼 절실하고 처절한 것이다. 인천에서 하노이로 가던 아시아나 여객기를 억지로 되돌려 보낸 베트남의 경우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한국이, 아니 전 세계가 싸우는 전염병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산업화 전문화 분업화 자동화가 고도화되면서, 또 경제가 발전할수록 인간 활동은 필연적으로 도시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이번처럼 확산이 빠른 전염병은 어느 국가에는 치명적인 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발 입국자와 중국거류 한국인에 대한 중국 측의 처사와 행태는 분명 비상식적, 비이성적, 비합리적, 비보편적이었다. 우리가 제때 신속히 ‘중국발 입국 금지’를 하지 않았다 해서 중국을 향한 푸념과 비판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자괴감에만 빠져 있을 수도 없다.
이럴수록 우리에게 중국은 어떤 존재인지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적반하장 격으로 중국이 한국발 입국자에 대한 검역을 강화하기 불과 1주일쯤 전에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을 향해 “중국의 어려움이 우리 어려움”이라고 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먼저 전화를 해 위로한다면 한 말이었다. 언론을 통해 이 메시지는 중국에도 잘 알려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결과는 영 엉뚱하게 돌아오고 있다. 외교의 기본은 상호존중일 것이며, 국가 관계의 기본도 상호주의일 것이다. 상식과 상호존중, 보편성과 균형, 일방이 아닌 쌍방향의 소통 같은 것에 입각해야 국가 간 관계도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상식이다. 하지만 중국에 한국의 어려움은 한국의 어려움일 뿐인 것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사드 보복’이후 계속돼온 한국과 중국 간의 엄연한 현실로 봐야 한다. 이번에 재확인 됐을 뿐이다. 다수 국민들 눈에는 뻔히 보이는 데 한국의 대통령과 정부만 못 보고 있나. 아니면 굳이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봐야 할 때다. 이른바 한·중 간 ‘운명공동체론’이다. 양국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불균형과 일방적·비상식적 행태의 원인이 짝사랑처럼 전개된 운명공동체론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지정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이웃 국가일뿐더러 한국 최대의 교역 상대국과 잘 지내자는 것은 물론 좋다. 거창하게 세계평화니 인류발전이니 하는 거대 담론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서로 대등한 여건에서의 ‘윈윈 발전’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을 볼 때 성급했고, 과했다.
근대국가, 민족국가 이론 같은 ‘국가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애초 나라 간에 운명공동체라는 말은 쉽게 쓸 말이 아니다. 어떤 운명을 맞아, 어떻게 공동체가 된단 말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집권 첫해에 중국에 가서 이 얘기를 꺼냈다. 양국 정상회담과 한중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행사 등에서 ‘운명적 동반자’ ‘운명 공동체 관계’라고 하면서 많은 언론이 이 말을 언급해왔다. 청와대나 외교부가 ‘운명공동체’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쓰이는 현실에 대해 부인하지도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뜻이 잘못 전달됐거나 지나친 표현이라면 뒤에라도 정부쪽에서 바로 잡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한국 쪽에서 운명공동체라고 하자 중국 쪽에서도 받아서 열심히 되풀이하고 있다. ‘얼씨구 좋은 말!’ 이러며 반기는 것 같은 분위기다. 올해 국내로 온 신임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도 첫 기자회견에서, 문희상 국회의장 예방 자리 등에서 이 말을 그대로 썼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어쩌면 “친하게, 대등하게, 잘 지내보자” 정도일 텐데 양국관계는 그렇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만히 있는 정부가 더 답답하게 한다.
잘못 꿴 단추라면 바로 잡아야 한다. 전문가들이 코로나 전염병 확산 초기부터 그렇게 중요성을 지적하며 요구했던 ‘중국인 입국 금지’조치를 하지 않은 결과가 어떤지 정부는 냉철히 봐야 한다. 이번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양국관계가 정상적으로 잘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운명공동체론에서는 빨리 탈피하는 게 바람직하다. 안 그래도 ‘중국 눈치보기 외교’ ‘친중 편향 외교’라는 평가나 문제제기가 자주 나왔다. 과도한 친중 외교의 한계는 ‘사드 보복’으로도 이미 확인 됐다.
중국을 경시하고, 소원하게 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존중하되, 서로가 대등하고 정중하게 존중하고, 가까이 지내면서 상호 번영을 꾀하되, 이성적·합리적·상식적·보편적 기준의 상호주의에 입각하자는 것이다. 운명공동체 같은 감성적 언어, 비과학적 슬로건에서 벗어나야 합리적이 된다. 서로가 할 말 하고, 그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일 때 서로가 동등한 경제발전의 파트너도 된다. 확산되는 신종 전염병으로 위기가 다가오고서야 양국관계의 실상이 여실히 확인됐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염병에 대한 검역과 방역은 역설적으로 한중관계가 한 단계 나아지는 과정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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