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 아프다…그러나 울지 않는다

입력 2020-03-04 17:36   수정 2020-10-18 15:48


4일 오후 2시 대구 대신동에 있는 서문시장.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시장은 지난달 25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사상 처음으로 엿새간 휴장했었다. 재개장 사흘째지만 4000여 개 점포는 대부분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다. 상가 사이에 줄지어 늘어선 국수가게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하던 일상은 온데간데없었다.

묵은 때가 묻은 마스크를 낀 채 기자를 만난 식품가게의 박모씨는 “손님이 좀 있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손님을 기대하고 나온 게 아입니더. 냉장고 음식 버리려고 나왔심더.” 시장 한가운데 소방서 앞에서 만난 택배기사는 “오늘도 한 건의 배달 주문도 받지 못했다”며 “도대체 이 지옥 같은 상황이 언제나 끝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날 대구지역 코로나19 확진자는 4000명을 넘어섰다. 확진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가파르다. 하루 500명 가까이 쏟아지고 있다. 도시는 침잠 그 자체다. 간혹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눈엔 불안과 낭패감이 가득하다. “왜 하필 대구냐”는 울분도 엿보인다. 결혼식도, 장례식도 전시처럼 치르고 있다.

코로나19 사망자를 화장하는 대구시립 명복공원을 찾았다. 눈물과 통곡이 그칠 새가 없었다. 가족이라도 방호복이 없으면 화장 과정을 지켜볼 수가 없다. 임종도 못했다는 유가족이 부지기수다. 의료진 방호복도 모자라다 보니 가족에게까지 제공하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다. 한 유족은 “확진 판정 후 병원에도 못 가보고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이별까지 가족이 지키지 못했다”며 “이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눈물을 쏟아냈다.

이곳에는 하루 40여 건의 일반 화장을 한 뒤 오후 5시부터 코로나19 희생자 화장을 하고 있다. 감염병관리법의 ‘선 화장, 후 장례’ 원칙에 따라 유족은 빈소도 제대로 꾸리지 못한 채 고인과 작별한다.

하지만 대구에는 또 다른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어떻게든 견뎌내고 이겨내야 한다는 의지가 이심전심으로 모이고 있다. 자신의 처지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대구 취재한 美 ABC도 감동…"이곳엔 두려워하는 군중이 없다"

취업난 속에 지난해 11월 문을 연 칠성시장의 야시장 청년들은 개장한 지 4개월도 못돼 코로나19 한파를 맞았다. 언제 장사를 접어야 할지 모를 위기 속에서 청년상인들은 200인분의 도시락과 커피를 이틀 연속 대구동산병원과 대구의료원 의료진에게 전달했다. 대구의 사회적 기업인 공감씨즈 허영철 대표는 타지에서 온 의사들을 위해 방 15개를 모두 내놓았다. 연대와 배려의 시민정신이다.

이른바 ‘대구 대탈출’도 없다. 자신이 혹시 감염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폭넓게 자리잡고 있다. 타지에 사는 자식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대구를 빠져나오라고 해도 거의 모든 부모들은 요지부동이다. 한때 정치권이 ‘대구 봉쇄’를 거론하는 결례를 저질렀지만 시민들은 일찌감치 자발적 봉쇄를 택한 것이다. 대구에 가족을 두고 있는 직장인 장영환 씨는 “몇 번이나 부모님을 찾아뵐까 했지만 각자 위치에서 코로나19를 이겨내자는 말씀에 서울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며 “코로나19와 싸워 이기는 길이 사회적 격리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문시장 맞은편에는 계명대 산하 대구동산병원이 있다. 환자 260명이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민간병원이지만 대구에서 가장 먼저 기존 환자를 내보내고 코로나19 확진자를 받고 있다. 병실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다 부산으로, 서울로 전전하다 목숨을 잃는 환자들을 보다 못해 민간병원이 수십억원의 손해를 무릅쓰고 개방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의료 현장이지만 또 다른 연대와 배려의 공간이기도 하다. 전국에서 생업을 접고 달려온 의사와 간호사 30여 명이 매일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경남 거제에서 온 의사 박태환 씨는 “의사의 본업은 환자 곁을 지키는 것”이라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봉사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시인 박미영 씨는 “생업을 접고 달려온 의사들에 대구시민은 엄청난 용기를 얻었다”며 “대구의 예전 모습을 되찾아주기 위해 대한민국 전체가 힘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병상을 구하지 못한 대구 환자를 광주로 데려가 치료하겠다는 광주 시민사회의 ‘병상 연대’도 큰 감동을 줬다.

서구 중리동 대구의료원에는 230명의 환자가 있다. 이곳에 근무하는 간호사들은 동산병원보다는 상대적으로 경력이 짧은 사람들이 많다. 갑작스럽게 확진자가 쏟아지면서 제대로 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한 채 전선에 투입됐다. 서명순 감염관리팀장은 “딸 같은 후배 간호사들이 몸에 맞지도 않는 큰 보호복을 입고 일하다가 쓰러져 자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절로 난다”고 말했다.

대구에서는 지난 3일 미국 ABC방송의 이언 패널 기자가 현장에서 쓴 기사가 화제다. ‘한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발병 중심지 안에서’라는 제목의 취재수첩이다. “… 그런데 공황상태를 찾아볼 수 없다. 폭동도 없고 수많은 감염환자를 수용하고 치료하는 데 반대하며 두려워하는 군중도 없다. 절제심 강한 침착함과 고요함이 버티고 있다…. 동산병원 원장은 의사, 간호사, 의약품, 병상 등 모든 것이 모자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코로나19는 대단한 전염병이 아니다. 이겨낼 수 있다’ ….”

권영진 대구시장의 말처럼 어쩌면 대구는 가장 소중한 ‘시민의 날’을 새로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를 대구에서 종식시켜 대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시민정신에 대한 자부심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올해 대구시민주간은 지난달 21일부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 민주운동 기념일인 28일까지였다.

대구=오경묵 기자 okmo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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