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무분별한 대남 도발과 도를 넘어서는 비방이 한두 차례도 아니었지만, 이번 ‘김여정 담화’는 달리 볼 필요가 있다. 북한 권부에서 신성불가침인 이른바 ‘백두혈통(김일성 직계후손)’으로, 2년 전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석한 이래 대남특사 역할을 해온 그가 대남비방전에 직접 나선 것이다. 유난스럽다고 할 정도로 대내외적 ‘메시지 관리’에 치중하면서 공도 들이는 것은 오래된 북한식 전통이다. 수령과 당의 이미지와 메시지는 다양한 이벤트와 함께 잘 준비된 언어로 표출돼왔다. 전달자의 격(格)과 급(級)으로 메시지 수위를 조절하는 데도 능하다.
대남비방에 처음 나선 김여정의 담화는 내용도 섬뜩하다. 청와대가 긴급 관계장관회의까지 열어 우려를 표시한 초대형 신형 방사포에 대해 드러내놓고 과시하면서 실전 배치까지 기정사실화했다. 사거리 확대, 발사간격 단축 등으로 기존 방사포의 성능을 완전히 개량해 우리 군의 사전탐지 및 파괴 체계인 ‘킬 체인(kill chain)’의 무력화를 노리는 무서운 무기다. 국제사회의 거듭된 우려에도 아랑곳없이 핵무기 보유를 자랑하듯 내세워 온 무력도발의 연장이다. 김여정의 비중과 역할을 감안할 때 대화는커녕 도발의 수위는 쉽게 낮아지지 않을 것이다.
김여정의 말폭탄은 거의 ‘패륜’ 수준이다. 온 국민이 사투를 벌이는 ‘코로나 전염병’과 관련된 대목은 조롱에 가깝다. 하지만 막말만 보고 “나라가 모욕당하고 있다”는 선에서 그칠 상황이 아니다. ‘평화의 제전’ 올림픽에 참가했고, 대한민국 대통령과도 직접 만난 북한의 최고 실세가 가당치 않은 험구(險口)를 늘어놓을 때는 잘 짜인 계산이 있고 노림수가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위장 평화’와 ‘북한에 끌려가는 평화’는 끝났다고 봐야 한다.
청와대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북한의 사과부터 받아내는 일이다. 3·1절에 맞춰 대통령이 ‘감염병 공동대응’을 제안하는 등 남북협력을 외치는데도 바로 다음날 미사일급 신형 방사포를 쏘아댔고, 이런 판에도 통일부는 남북철도 연결과 북한관광을 올해 업무라고 보고하는 비상식적인 불균형을 언제까지 봐야 하나. 이러는 사이 북한의 본모습도 못 보고, 남북·미북 간의 현실도 못 볼까 걱정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김여정의 말은 똑같이 맞대응하자고 보면 전쟁도발 수준의 공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무대응이다. 핵무기에 집착하며 도발을 일삼는 북한도 극히 비정상이지만 현실성 없기는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다. 이러면서 긴장과 대치, 충돌의 수위가 슬그머니 올라간다는 게 진짜 문제다. 이제라도 북한에 엄중 대처하면서 대북정책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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