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너에게 쓴 마음이/벌써 길이 되었다./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너에게 쓴 마음이/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마침내는 내 생 풍화되었다.’
봄꽃이 피고 질 때마다 ‘너’를 생각하고, ‘꽃 진 자리’에 새 잎이 피고 ‘잎 진 자리’에 새가 날아와 앉는 동안에도 ‘너’를 생각한다. 그 마음이 ‘길’이 되고 ‘신발’이 되고 ‘일생’이 되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참으로 애틋한 시다. 시는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 긴 울림을 준다. 말을 아끼고 벼리는 시인의 각고(刻苦) 덕분이다.
천양희 시인의 ‘벌새가 사는 법’을 보자. 그는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제 몸을 쳐서/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이나/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내 몸을 쳐 시를 쓰나’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우리의 호흡은 1분에 16~17회, 맥박은 60~70회에 불과한데 작은 벌새가 1초에 90번씩 날갯짓을 하다니! 마음이 느슨해질 때마다 꺼내 읽고 싶은 시다.
유안진 시인은 어떤가. 그는 54세에 제주로 유배된 추사 김정희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일깨운다.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오십령 고개부터는/추사체로 뻗친 길이다/천명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닳고 터진 알발로/뜨겁게 녹여 가라신다.’(‘세한도 가는 길’ 부분)
유안진 시인의 풍자와 해학도 맛깔스럽다.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남이 터뜨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나 스스로 터뜨리면 병아리가 되지//환골탈태(換骨奪胎)는 그런 거겠지.’(‘계란을 생각하며’)
‘옛날 애인’이라는 시에서는 ‘봤을까?/날 알아봤을까?’라는 단 두 줄로 단시(短詩)의 묘미를 극점까지 끌어올린다. 그 행간에 세월 따라 나이가 든 옛사랑의 여운과 엇갈린 두 사람의 인생 얘기가 여울져 흐른다.
요즘처럼 사람들 마음에 날이 서 있을 때에는 한상호 시인의 ‘화해’를 음미해볼 만하다. ‘꽃이라고 보니//뽑아 버릴 풀이 없네’. 2행 14자 속에 삶의 이치가 압축돼 있다. 그는 누군가 내 마음을 몰라줘 서운할 때 ‘아무도 모르라고//몰라도 괜찮다고//잎인 듯 줄기인 듯//붉어지면/알 거라고’(‘대추꽃’)라며 자신을 가다듬는다. 아내를 챙겨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은 이렇게 슬쩍 표현한다. ‘먹어 주고 싶다/대신//아내 나이 한 살’.(‘생일 선물’)
광화문엔 아직 꽃소식이 없다. 마스크만 오간다. 그래도 돌 틈새로 손을 내미는 새싹, 이제 막 움을 틔우는 꽃망울, 희망의 씨앗을 품은 시가 있어 봄은 정녕 멀지 않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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