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매일 게 없는데…리키는 왜 '과로의 굴레'에 빠졌을까

입력 2020-03-06 17:35   수정 2020-03-07 02:19


“고용 계약 같은 거 없고 목표 실적도 없어요. 출근 카드도 없고 알아서 일합니다. 자신 있어요?” “그럼요! 이런 기회를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리키(크리스 히친 분)가 택배기사로 일하기 위해 면접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리키의 새 일자리는 법정 근로시간 기준도 없고, 정해진 월급도 없다. 대신 배송한 건수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다. 회사 매니저는 리키에게 “채용되는 게 아니라 합류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금융위기 때 직장을 잃고 일용직을 전전하던 리키는 이 기회를 ‘생명줄’처럼 붙잡는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을 얻을 것이란 희망에 가득차서다.


‘플랫폼’이 만든 일자리

리키의 가족은 네 명. 마음씨 따뜻한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 분)와 고등학생 아들, 중학생 딸이 있다. 새로 시작한 택배 일은 리키에겐 가족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다. 리키는 아침 7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미술에 재능이 있는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착하고 똑똑한 딸도 남부럽지 않게 키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당신은 고용된 기사가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라는 매니저의 말에 리키는 한껏 고무된다. 그가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받은 것은 손바닥만 한 단말기다. 매니저는 신신당부한다. “이건 ‘심장’ 같은 겁니다. 시스템에 등록돼 배송이 완료될 때까지 추적되죠. 배송 경로도 짜줄 거예요.” 단말기는 디지털 플랫폼을 상징한다. 리키에게 사무실 같은 전통적인 작업장은 없다. 대신 단말기를 통해 외부에서 업무를 수행한다. 리키가 찾는 택배 수요도 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관리된다.

리키가 일하는 방식은 플랫폼 노동이라고 불린다. 플랫폼의 중개를 통해 일감을 찾고, 건당 보수를 받으며, 고용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독립사업자 방식으로 일하는 근로 형태다. 플랫폼 기업은 빅데이터 등을 수집해 택배 수요자와 기사를 직접 연결한다. ○애비가 14시간씩 일하는 까닭

리키가 일을 시작하면서 아내인 애비도 꿈에 부푼다. 오랜 월세살이를 청산하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도 품는다. 리키 같은 플랫폼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장을 긱(gig) 이코노미라고 한다. ‘긱’이란 단어는 1920년대 미국 재즈클럽에서 섭외한 단기 연주자를 부르던 말이다. ‘긱’들은 공연을 건별로 계약하고, 공연장에 있는 악기가 아니라 자신의 악기로 연주했다. 리키 역시 없는 살림에 허리띠를 조여 배송용 승합차를 새로 구입한다. 긱 이코노미는 리키 같은 저숙련 노동자에게 노동시장에 진입할 기회를 제공한다.

요양보호사인 애비가 일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간병이 필요한 가정을 순회하며 방문 건별로 보수를 받는다. 애비가 하루에 14시간 일하는 것을 보고 누군가 놀라 “하루 8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불법 아니냐”고 묻자 애비는 이렇게 답한다. “‘제로 아워(zero-hour)’ 계약이라서 그런 것 없어요.” 최저 근무시간이 0시간인 계약, 이른바 제로 아워 계약은 근무시간이 따로 명시돼 있지 않다. 원칙적으론 일하고 싶을 때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다. 리키와 애비가 일반적인 임금 노동자의 법정 근로시간보다 더 오래 일하는 것 역시 빠르게 돈을 모으기 위해 긱 이코노미의 특징을 활용한 것이다.

기업에 긱 이코노미는 정규직을 고용할 때 부담해야 할 ‘고정비용’을 줄여준다. 정규 직원을 고용한다면 생산량에 관계없이 월급을 줘야 하기 때문에 보수가 곧 고정비용이 된다. 반면 기업의 비용 중엔 생산량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비용’도 있다. 커피 회사로 치면 원두, 우유, 설탕 등 원료 구입 비용이 대표적이다. 리키 같은 인력은 택배량이 줄면 자동으로 보수도 줄어든다. 플랫폼의 발전이 기업의 고정비용을 가변비용화한 셈이다.

노동 공급이 늘면 임금은 줄고

리키는 배송 물량을 받으러 간 어느 날 아침 떠들썩한 상황을 목격한다. 동료 택배기사 중 한 명이 새벽에 사고를 당해 운행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차 수리를 위해 두 시간만 기다려달라는 기사의 요청에 매니저는 매몰차게 답한다. “안 된다. 대체 기사를 쓰겠다.” 플랫폼 노동자의 이면엔 불안정한 처우가 있다. 플랫폼의 효율성을 위해선 고용의 유연성이 어느 정도 담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오픈돼 있으면 노동력은 계속 유입된다. 만약 경기 불황으로 직장을 잃은 뒤 택배기사로 일하려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노동은 초과공급될 가능성이 크다. <<span style="background-color:#faebd7;">그래프>에서 노동공급곡선이 S1에서 S2로 이동하면(노동 공급이 증가하면) 임금은 W1에서 W2로 하락한다. 플랫폼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이유다.

돈벌이가 급한 리키는 무리한 선택을 한다. 사고당한 기사의 자리를 꿰찬 것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경쟁 상대는 일반적인 임금 노동자 시장과는 다르다. 온라인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경쟁해야 할 때도 많다. 특별한 능력이 있어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이 같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배송업은 진입장벽이 낮아 경쟁이 치열하다.

기회비용에 밀린 가족

리키가 일을 늘리며 순항하는 것 같았던 리키네 가족. 갈등은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로부터 시작된다. 길거리에 불법 낙서를 하고, 가게에서 물감을 훔쳐 골치를 썩인다. 일에 쫓겨 더 이상 관심을 주지 못하는 아빠 리키를 향한 삐뚤어진 외침 같아 보이기도 한다. 리키는 아들을 붙잡고 설득한다. “공부해서 대학엘 가야지. 매일 14시간씩 일하다 보면 결국 노예가 되는 거야.” 자신에 비유하는 듯한 리키의 말에 아들은 맞받는다. “아빠가 선택한 거잖아. 주어진 게 아니라 아빠 스스로 된 거야.”

문제는 아들이 사고를 칠 때마다 수습하느라 일조차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기회비용은 어떤 선택을 위해 포기한 모든 것을 뜻한다. 만약 아들의 사고를 수습하는 데 반나절을 썼다면 반나절 동안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반나절 보수가 5만원, 대체 기사 비용에 대한 부담이 5만원이라면, 반나절 휴가의 기회비용은 총 10만원이 된다. 부재 시 바로 인력이 대체되는 플랫폼 시장에선 기회비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200파운드(약 30만원)의 기회비용을 감수하고 사고를 친 아들을 경찰서에서 데려온 날, 리키는 소리를 지른다. “오늘 얼마 날린 줄 알아? 대체 기사 100파운드(약 15만원)에 하루 공치고 벌점까지!” 그날 아들은 집을 뛰쳐나간다. 리키의 승합차 열쇠도 함께 사라진다. 리키는 아들의 짓임을 직감하고 분노한다.

리키는 다시 출근하고…

아들이 집을 나간 뒤 밖을 서성거리던 리키는 딸의 전화를 받는다. 늘 사려 깊게 리키를 배려해왔던 막내딸이다. 딸은 울면서 고백한다. “차 열쇠를 숨긴 것은 오빠가 아니라 나야. 열쇠를 숨기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어.” 리키와 애비가 모두 일거리를 늘리면서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지자 가족의 품이 그리워진 딸이 아빠의 출근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리키는 다시 일하러 간다. 택배 강도에게 물건을 빼앗기고 폭행당한 채 돌아온 다음날에도 잔뜩 부은 눈으로 출근길에 오른다. 아들은 차 앞을 막아서며 외친다. “맞아서 한쪽 눈이 안 보이잖아. 운전하면 안 돼.” 하지만 리키는 무작정 차에 시동을 건다. 리키 앞에 놓인 길은 가족을 위한 길일까, 아니면 가족을 잃는 길일까. 리키의 승합차는 휘청거리면서 그래도 앞으로 나아간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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