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고학과 통학과 눈물의 출석부

입력 2020-03-10 17:38   수정 2020-03-11 00:11

해마다 3월이면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각급 학교의 개학이 연기되는 등 학사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다. 참으로 특이한 경우라 하겠다. 필자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아픈 기억에 사로잡혀 밤잠을 설치곤 한다.

초등학교 때는 그렇다 치고, 중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수업료와 교과서 구입비 문제로 주눅이 들어야 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그 허기진 보릿고개에 이 못난 자식의 학비를 어떻게 마련할지 고심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괴로웠다.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인가, 아니면 학교를 그만두고 날품팔이든 뭐든 밥벌이에 나설 것인가 하는 절박한 갈림길에서 극심한 갈등과 혼란을 겪어야 했다.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누님들이나 겨우 초등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마친 동생들을 생각할라치면 나만 학교에 다니는 호사가 죄의식이랄까, 죄책감으로 작용하면서 양어깨를 짓눌렀다.

슬펐다. 부모님은 중요한 고비에 빚을 내 학비를 마련해 주셨다. 교복과 헌 교과서와 체육복도 사주셨다. 학교를 그만두려 해도 섣불리 그럴 수가 없었다. 속된 말로 본전이 아까웠다. 고교 때는 어찌어찌 고학으로 학비를 조달했다. 그때부터는 일단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리게 돼 다소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통학도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는 가까운 이웃 마을에 있었지만, 중고교는 30리 밖에 있었던 터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면 하숙을 하거나 버스 또는 자전거로 통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부잣집 학생의 사치스러운 잠꼬대에 지나지 않았다. 필자는 그 머나먼 길을 걷고 또 걸으며 도보로 통학했다. 점심은 쫄쫄 굶었다. 아침저녁으로 자갈투성이 신작로를 왕복할라치면 운동화가 뭉텅뭉텅 닳았다. 그 뼈저린 ‘고학’과 ‘통학’은 언제부턴가 내 학창시절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몸은 늘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 학교로 들어서면 몸이 파김치처럼 축 늘어졌다. 학교 일과를 마치고 또다시 먼 길을 걸어 집에 돌아오면 배고픔과 피로가 뒤엉켜 입에서 쓴 내가 났다. 공부가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하지만 나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 험난한 환경에서도 초·중·고교 12년 개근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나의 눈물 어린 출석부에는 애당초 ‘결석’과 ‘지각’, ‘조퇴’가 존재하지 않았다. 새 학년 새 학기를 맞아 꿈과 희망에 넘치는 전국 각지의 학생들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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