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인 지난 8일 오후 8시. 국내 헤지펀드업계 1위 타임폴리오자산운용의 서울 여의도 본사 회의실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황성환 사장을 비롯해 전체 주식 펀드매니저 14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매주 일요일 열리는 이 회의에서는 다음 한 주의 시황을 전망하고 각 매니저의 운용 전략을 공유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미국 나스닥지수가 지난 5~6일 이틀간 4.9% 급락한 만큼 시장의 반등 여부를 놓고 격론이 오갔다. 한 매니저는 “과거 전염병 유행 사례를 볼 때 글로벌 증시의 낙폭이 이미 과도한 수준”이라고 주장한 반면 다른 매니저는 “미국 유럽 등에 확산 중인 코로나19 이벤트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데다 국제 유가 하락도 심상치 않다”고 맞섰다.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졌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타임폴리오 관계자는 “운용 전략과 아이디어는 서로 공유하지만 투자 의사결정은 사장이 아니라 개별 매니저의 몫”이라며 “이처럼 각 매니저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멀티 매니저’ 시스템이 타임폴리오를 국내 1위 헤지펀드 운용사로 키운 일등공신”이라고 설명했다.
주식 투자에 눈뜬 ‘흙수저 청년’
타임폴리오 성공 신화의 주역인 황 사장은 1976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외아들인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1995년 서울대 지구환경공학부에 입학한 지 1년 만인 1996년 군에 입대했지만 일병 때 아버지가 말기암 판정을 받았다. 한 달 반 만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홀로 남은 그는 인생이 막막했다. 의가사 제대도 가능했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군에 복귀한 그는 1998년 말 만기 전역해 홀로서기에 나섰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단돈 1600만원으로 학교 인근 신림동에 옥탑방 전세를 얻었다. 때마침 인터넷 붐이 일고 있었다. 당시 새롬기술 투자로 대박을 냈다는 고종사촌 형을 보고 1999년 가을 주식 투자에 입문했다. 처음엔 과외 아르바이트로 모은 300만원으로 시작했다. 주식을 배우고 싶어 공대생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 경영대 투자 동아리인 ‘스믹(SMIC)’에도 가입했다. 주식 공부에 푹 빠졌다. 친척집에 신세를 지기로 하고 전세금 1600만원까지 빼내 본격적인 트레이딩을 시작했다. 배수진을 친 셈이다. 잠을 줄이고 끼니도 대충 때우면서 온종일 주식에만 몰두했다.
종잣돈은 2000년 말 3000만원까지 불었다. 2001년부터는 각종 증권사 실전투자 대회를 휩쓸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수익과 상금을 재투자해 2004년 20억원을 만들었다. ‘슈퍼 개미’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손복조 당시 사장 권유로 대우증권(현 미래에셋대우)에 입사, 1년여간 딜링룸에서 일했다. 제도권 금융회사에서의 조직 생활 경험은 그가 창업 후 회사를 경영하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멀티 매니저로 정착된 자율과 경쟁
1년여 만에 사표를 낸 그는 그동안 모은 자금을 모두 털어 한 사모펀드를 인수했다. 겨우 스물아홉의 나이였다. 회사 이름은 시간(time)과 투자집합(portfolio)의 합성어인 타임폴리오로 지었다. 타임폴리오는 호흡이 긴 장기 가치투자보다 당장 올라가거나 내려갈 종목만 골라 투자하는 ‘롱쇼트 전략’에 충실한다. 매주 일요일 저녁 운용 전략 회의를 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주간 매매할 종목과 전략이 이 회의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여기서 펀드 자금을 전체 매니저별로 쪼개 개별적으로 운용하도록 한 멀티 매니저 시스템이 빛을 발한다.
황 사장도 이 회의에서만큼은 계급장을 떼고 똑같은 매니저 일원으로서 토론에 참여한다. 의견 발표를 위해 스스로 파워포인트(PPT) 자료를 준비하는 등 신경을 곤두세운다. 각 매니저의 운용 성과는 6개월마다 공식 집계된다. 수익률이 좋으면 더 많은 자금을 배분받지만 반대로 나쁘면 전체 펀드 내 비중이 축소된다.
이런 자율과 경쟁 원칙은 타임폴리오가 지난 10여 년간 꾸준한 성과를 내며 업계 1위를 지켜온 원동력이다. 수익률도 업계 선두권이다. 2016~2018년 잇따라 출시된 11개 헤지펀드 가운데 1개를 제외한 나머지 펀드는 모두 누적 수익률이 20~30%(지난달 27일 종가 기준)에 달한다. 타임폴리오가 현재 운용 중인 펀드는 헤지펀드(7856억원), 코스닥벤처펀드(2042억원), 대체투자(475억원) 등을 모두 합쳐 1조3911억원 규모다.
2008년 47억원에 불과하던 자기자본은 지난해 말 957억원으로 20배 넘게 증가했다. 2016년 투자자문사에서 전문사모운용사로 전환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고 지난해 7월에는 국내 헤지펀드 운용사로는 최초로 공모펀드 운용 허가도 취득했다. 그리고 두 달 후 선보인 타임폴리오의 첫 사모재간접 공모펀드인 ‘타임폴리오위드타임’은 한 달여 만에 1000억원을 끌어모으며 화제가 됐다. 타임폴리오위드타임은 타임폴리오가 운용 중인 11개 헤지펀드에 분산 투자한다. 지난 2일 현재 타임폴리오위드타임 펀드의 설정 후 수익률은 1.81%로 같은 기간 코스피 수익률(-4.26%)을 웃돌고 있다.
“주주·직원·투자자가 과실 나눠야”
황 사장의 운용 철학은 상생상락(相生相樂)으로 요약된다. 말 그대로 주주와 직원, 투자자가 성장의 과실을 함께 나눠야 한다는 뜻이다. 황 사장이 젊은 인재를 등용해 도제식 교육으로 투자 비법을 아낌없이 전수하고 2015년 업계 최초로 종업원지주회사 제도를 도입한 것도 이 같은 철학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타임폴리오는 황 사장의 지분(57.9%)을 제외한 나머지 42.1%를 모두 임직원이 나눠 보유하고 있다.
황 사장은 이제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지난해 2월 싱가포르에서 현지 운용사 인가를 획득했으며 중국인 매니저 등 현지 직원 세 명도 채용했다. 중국 등 아시아 지역의 리서치 역량을 강화하고 다양한 글로벌 투자 기회를 발굴하겠다는 취지에서다. 국내 1위 헤지펀드 운용사를 넘어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선 황 사장의 올해 나이는 불과 마흔넷. 앞으로 그의 여정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 황성환 타임폴리오자산운용 사장
△1976년 경북 의성 출생
△1995년 조선대부속고 졸업
△2004년 서울대 지구환경공학부 졸업
△2004년 대우증권 입사
△2005년 타임폴리오앤컴퍼니 대표
△2008년 타임폴리오투자자문 대표
△2016년~ 타임폴리오자산운용 대표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