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 기자] 2017년 미국에서는 ‘보병대 장교’ 교육 과정을 수료하며 첫 여성 보병 소대장이 탄생했다. 미 해병에서 가장 혹독한 군사 훈련 과정을 뒤로하고 극적인 변화가 찾아오는 순간. 이처럼 시대는 남녀의 구별보다 능력의 유무를 판단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치관을 존중하는 현대 사회에서 ‘성(Gender)’이라는 경계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젠더리스 신드롬(Genderless Syndrome)’, 이름 그대로 성에 대한 인식과 관념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동안의 인류는 남녀 간의 구별을 철저히 하며 역할에 맞는 모습을 그려왔다. 지위, 직업, 가치관까지 개인의 성향보다 성별의 방향성이 우선인 사회였다. 새로운 바람을 맞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다각적인 변화가 일었다. 비로소 수동적인 시대를 벗어나고 있는 셈.
최근 컬렉션에서 남성 모델들에 핑크 컬러의 재킷을 입히기도 하며 중년 여성이 입을 법한 그래니 원피스를 레이어드하기도 한다. 이제는 여성 모델이 남성용 슈트나 볼드한 워크 웨어를 입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젠더리스 웨어는 이런 개념에서 본다면 성의 구분이 예측하기 어려운 스타일링이라고 설명할 수 있으며 놈코어 패션의 시작이자 그 중심이 되었다.
젠더리스 웨어의 철학은 ‘모두의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시작된다. 아름다움을 누구에게나 있는 가치라고 생각하고 성별과 관계없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꿈꾸는 것. 그뿐만 아니라 패션쇼를 통해 의류를 선보이는 것 외에도 사회적 이슈를 상기할 수 있는 메시지가 된다. 다시 말해서 젠더리스 웨어는 패션을 뛰어넘어 대중에게 사회, 문화적으로 고착된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기획 기사에서는 패션계에서 ‘젠더리스 신드롬’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분석해보고자 한다.
[New High Fashion Wear]
2020년 가을, 겨울 컬렉션의 ‘버버리(Burberry)’는 확고하면서도 당당하다. 새로운 수장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는 봄, 여름 컬렉션을 시작으로 런웨이의 날개를 폈다. 펑크, 클래식, 고딕 무드 등 다양한 이미지를 자신만의 그림으로 승화시키는 티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기대를 흡수한듯했다.
‘브리티시 헤리티지(British Heritage)’의 대표주자인 버버리는 그동안 정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짙은 베이지 컬러의 트렌치코트와 그에 맞는 두툼한 팬츠까지 시그니처를 위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그들이 변화를 그리게 된 것. 티시는 코트의 칼라와 디테일 컷을 매만지며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소재의 발견도 신비롭다. 모피, 실크, 스웨이드 등 갖가지 질감으로 영국을 표현한 그들. 고전적 표식이 뚜렷한 퀼팅 재킷은 티시만의 섬세하고 창의적인 영감을 보여준다. 기존에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던 승마복에 버버리의 미학을 살린 것. ‘Memories’라는 컬렉션의 주제와 걸맞게 표현과 소통에 대한 향수가 두드러진다.
카 코트, 더플 코트 등 남성들만의 전유물일 것만 같았던 아이템은 새 시대를 맞아 혁신적인 무늬로 나아갔다. 특히 이번 컬렉션의 버버리 체크는 더욱더 유니크하다. 격자무늬는 더 다채로워졌으며 그 규격은 불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고전의 아름다움과 미래적 방향성을 모두 잡은 그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자리를 옮긴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은 1970년대 ‘파리지앵(Parisian)’에 눈을 돌렸다. 수많은 ‘셀린느(Celine)’의 팬에게 욕설과 찬사를 함께 받는 그인 만큼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젠더리스 웨어를 자랑한다. 이전 브랜드에서 보여주던 락시크 룩과 도시적 미학은 무너지지 않고 더욱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패션을 통해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부르주아 클래식’은 독특하면서도 웨어러블하다. 회상과 촉망의 그 중간 어딘가에 자리하는 이 컬렉션은 무엇보다 강렬한 그림이 돋보인다. 보타이, 화려한 금색 프린팅, 두툼한 넥 러플 등 언뜻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디테일은 ‘1970년대 놈코어 룩’이라는 특성 안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다. 금색과 은색 아이템으로 장식된 벨벳 맥시 스커트는 그의 영감이 깃들어 있다.
2020년 가을, 겨울 컬렉션부터 남녀 컬렉션을 재통합하기로 한 셀린느는 ‘젠더리스 뉴트럴’ 위에 궁극적인 화려함을 더했다. 이와 함께 레더 굿즈와 향수 등 더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을 런칭하며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디올 옴므(Dior Homme)’, ‘생 로랑(Saint Laurent)’에서 청중들을 스키니한 모델로 자극했던 그의 영감이 다시금 발현되는 듯했다.
노출 없는 의상 속에 ‘섹슈얼리즘(Sexualism)’은 런웨이 무대 곳곳에서 포착됐다. 살아생전 스페인 조각가 ‘세자르 만리케(Cesar Manrique)’가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모았던 보석과 원석은 슬리먼의 그림으로 재탄생했다. 그 재료로 만들어진 펜던트는 목걸이, 브로치 등 무대 위 액세서리로 완성되어 우아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젠더리스 웨어 위 섹슈얼리즘을 이룩했던 것.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트렌드에 도전하는 ‘프라다(Prada)’는 변신의 마술사. ‘라프 시몬스(Raf Simons)’가 프라다의 공동 디렉터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그 변신에 더욱더 극적인 요소였다. 진부한 여성의 이미지를 거부하는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는 무대 위 새로운 캠페인을 전개한다.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 새로운 스타일이 탄생한다”라는 그의 말처럼 프라다는 미래적인 활주로를 여는 듯했다.
이번 컬렉션의 프라다가 바라보는 것은 ‘뒤바뀌어진 정체성’. 기존에 여성성을 상징하던 다이아몬드와 보석은 실크 프린지와 제트 비즈로 대체되어 그 모습 자체로 정의할 수 없게 됐다. 오버 핏 벨트 재킷은 프린지 스커트와 짝을 이루는 반면 클래식 셔츠는 종말을 맞이했다. 양팔이 잘려 나간 채로 실크 원피스와 움직이며 넥타이를 움켜준 모습이었던 것.
아우터에 대한 색다른 해석도 흥미롭다. 버건디, 그레이, 머스타드 컬러를 바탕으로 패디드 재킷을 만들었다. 중간지점에는 벨트를 첨가하고 넥타이 레이어드링을 놓치지 않아 유니크 웨어적 특성을 살린 셈. 삼각형 프라다 로고는 왼쪽 가슴 한가운데에서 굳건하게 자기 모습을 유지하며 정통적 빛깔을 계승했다.
‘초현실주의 글래머’라는 테마로 진행된 이번 프라다 컬렉션은 부드러운 실크 테일러링과 컷아웃, 프린지, 플로랄, 미니 백 등 스포티한 요소를 융합해 ‘뉴 하이패션 웨어’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정통적 복식을 따르기보다는 미래의 물결을 일으키는 그들이다. 여성의 내재적 권위를 내세운다기보다는 실용적 ‘오뜨 꾸띄르(Haute Couture)’의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다. (사진출처: Y 프로젝트, 버버리, 셀린느, 프라다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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