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미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끈 힘은 '창조적 파괴'

입력 2020-03-12 18:02   수정 2020-03-13 02:56

1620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오늘날과 같은 세계경제포럼이 열렸다고 상상해보자. 비단 예복을 입은 중국 학자, 꼭 끼는 상의에 조끼를 걸친 영국 모험가, 터번에 카프탄 차림을 한 터키 공직자 등 세계의 실력자들이 알프스 산골에 모여든다. 포럼의 주제는 ‘다가오는 세기에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과 에이드리언 울드리지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정치부장이 함께 쓴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는 ‘400년 전 상상 이야기’로 시작한다. 당연히 세계를 지배할 후보군에 북미 이주민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이다. 세계 인구의 5%에 불과하지만 미국 달러 기준으로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창출한다. 미국은 어떻게 이런 놀라운 부를 이뤄냈을까.

그린스펀과 울드리지는 미국 자본주의 400년 역사의 대서사시를 탁월한 데이터 분석과 정교한 스토리텔링으로 흥미진진하게 들려주며 이 물음에 답한다. 저자들은 미국의 최대 경쟁우위가 창조적 파괴를 이루는 능력에 있음을 거듭 밝힌다.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관통하는 진보의 동력이 바로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힘이라고 설파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미국이 번성한 주된 이유는 파괴가 창조의 대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파산법은 기업이 사업을 접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미국은 유령도시와 문을 닫은 공장이 진보의 대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저자들은 근래 약화되고 있는 미국의 역동성을 되살릴 정책들을 제안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무엇보다 1991년 복지제도를 개혁한 스웨덴의 전례를 따를 것을 촉구한다. 복지제도 못지않게 금융시스템 개혁도 강조한다. 금융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은행들이 훨씬 많은 자기자본과 담보를 보유하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2018년 미국에서 출간돼 현지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책마을 ‘글로벌 핫북스’ 코너에서 먼저 소개한 책이다(한국경제신문 2018년 11월 23일자 A26면 참조). 2년여 만에 한국어 번역판이 나왔지만 지금 읽어도 역사 공부의 지적 즐거움과 함께 혁신과 성장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준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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