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한진칼의 주주총회 안건에 대한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의 권고 결과가 확정되면서 국민연금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의결권 자문사들의 권고 방향이 엇갈리고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측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KCGI·반도건설(이하 3자 연합)이 계속해서 한진칼 지분을 사들이며 정기 주총 이후의 또 다른 분쟁을 예고하고 있어서다. 국민연금은 주주총회 직전까지 두 세차례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를 열고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할 예정이다.
◆한진칼 안건 검토 나선 수탁위
2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오는 24일 올해 8번째 수탁위를 열고 한진칼 등 투자 기업들에 대한 의결권 행사 방향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지난 6일 열렸던 수탁위 제5차 회의에서 위탁운용사에 맡겨져 있던 한진칼 의결권 2.9%를 회수해 수탁위가 직접 행사하기로 결정한 이후 약 3주일만이다. 수탁위가 이날 논의만으로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할지는 미지수다. 위원 간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27일 예정된 한진칼 주총 직전(26일)에 최종 결정을 내릴 전망이다.
앞서 국내외 주요 의결권 자문사들은 한진칼 주총 안건에 대한 분석을 완료하고, 그 결과를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에게 전달했다. 국민연금 국내 주식 의안 분석을 맡고 있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을 비롯해 서스틴베스트,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등 국내 의결권 자문사와 글로벌 자문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 등이 의결권 행사 권고를 마쳤다. 실질적으로 한진칼 주총 안건에 대한 외부 기관의 평가가 마무리된 셈이다.
이번 주총의 ‘태풍의 핵’인 조원태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을 비롯한 이사진 선임과 관련해 의결권 자문사들은 대체로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KCGS와 ISS, 대신지배구조연구원 등 3개 자문사가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에 찬성을 권고했다. KCGS는 △한진칼 이사회가 외부 주주가 요구하는 지배구조와 재무개선의 의지를 보여준 점 △항공산업의 업황이 심각한 수요부진을 겪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현 경영진 유지가 장기적 주주가치 제고에 적합하다는 이 같은 점에서 의견을 제시했다. ISS는 조 회장이 회사의 중장기적 가치와 주주가치를 높일 수 있는 경영 능력을 갖추고 있고, 현재로선 결격 사유가 없다는 점을 찬성의 근거로 들었다.
조 회장 연임에 반대표를 던진 자문사는 서스틴베스트가 유일했다. 서스틴베스트는 조 회장에 대해 ”계열 회사의 기업가치를 훼손한 이력이 있어 사내이사로서의 적격성이 결여된다“며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 의견을 냈다. 국토교통부가 2018년 조 회장이 공식 업무권한이 없음에도 계열사인 진에어의 내부문서 수십건을 결제한 것을 문제로 삼아 신규노선 허가 제한 등 행정처분을 내림으로써 기업가치를 훼손시켰다는 것이 서스틴베스트 측의 분석이다.
KCGS와 ISS 또한 찬성을 권고했지만, 일감 몰아주기 의혹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점 등을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보고서 작성일 기준으론 법적 판단이 완료되지 않아 결격 사유에 해당하지 않아 찬성 의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향후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한 것이다. KCGS는 보고서에서 ”기관투자자에 따라선 조 회장이 사내 이사로서 갖추어야 할 책임성, 직무 충실성 등을 갖추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으며 그 경우 KCGS의 권고와 달리 판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원태 대세 잡았지만...엇갈리는 자문 결과
여타 이사 후보들에 대해서도 회사측이 근소한 우위를 점했지만 의견은 다소 갈렸다. KCGS는 사외이사와 사내이사 모두 회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양측이 제시한 후보 모두 개인적 결격 사유는 없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경영진을 교체하는 결정이 기업가치 제고에 부합할지 의문“이라는 것이 KCGS가 밝힌 취지다. KCGS는 ”KCGI(강성부 펀드)를 제외한 주체들이 추구하는 바가 강성부 펀드와 일치하는지가 불분명하다“고도 지적했다. ‘땅콩 회항’의 당사자인 조현아 전 부사장과 한진그룹이 보유한 유휴자산을 활용한 사업 기회를 노려 이번 분쟁에 뛰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반도건설의 의지가 강성부 펀드와는 다를 수 있다는 분석이다.
KCGS를 제외한 나머지 자문사들은 양측의 이사 후보군에 대해 선택적으로 찬반 의견을 냈다. ISS는 사외이사 후보 군 가운데 회사 측이 제시한 5명 가운데 2명(임춘수, 이동명)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다. 3자 연합 측 사외이사 후보에 대해선 모두 반대 의견을 냈다. 하지만 3차 연합 측 사내 이사 후보 중 하나인 김신배 포스코 이사회 의장에 대해선 찬성 의견을 냈다. 대신지배구조연구소 역시 이사 후보군에 관련해 선택적인 의견을 낸 것으로 전해진다. 서스틴베스트는 대체로 3자 연합의 손을 들어줬다.
한편 의결권 자문사들은 정관의 변경 문제에 관해서는 회사 측 제안보다 3자 연합 측 제안을 훨씬 더 많이 수용했다. KCGS와 ISS, 서스틴베스트 등 자문사들은 전자투표제도 명문화, 사외이사 자격기준 명문화, 이사회 권한 강화, 이사회 성별 구성 다양화, 감사위원회 구성원 증가 허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3자 연합 측 정관 변경안이 회사 측 안보다 낫다고 봤다. 이사회 구성의 문제에서는 일단 조 회장 측의 손을 들어줬지만, 회사 정관 변경 등에 대해서는 3자 연합 측이 제안이 훨씬 설득력 있고 주주가치 제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의결권 자문사들의 판단이다.
◆의결권 쪼개기 가능할지도 '관심'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한진칼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두고 국민연금은 최대한 신중을 기하는 모양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 확산으로 지난 18일 기준 157개국이 한국으로부터의 입국을 금지 또는 제한하면서 항공 산업의 업황은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경영권의 향방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안에 ‘잡음’이 나오면 안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라는 것이 수탁위 내외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다.
수탁위는 주주권 행사와 관련해 기금운용본부가 판단하기 어려운 주요 사안을 검토해 기금운용위원회에 보고한다. 최종 의결권은 기금운용위원회에 있지만 의결권 행사 방향 결정 및 공개 중점관리 기업 선정 등에 대한 1차 결정권을 갖는다. 수탁위는 현재 3명의 상근 전문위원을 비롯해 총 9명의 민간 전문가로 구성돼있다. 수탁위의 결정은 9명 위원들의 투표를 통해 이뤄진다. 수탁위 ’운영규정‘에 따르면 수탁위는 재적위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안건을 의결한다. 위원 전원이 참석한다고 가정하면 한진칼에 대해 5명 이상의 의견이 모아져야 특정 방향의 의결권 행사가 가능한 셈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수탁위 위원 9명의 의견이 합치가 이뤄지지 않자 당시 수탁위와 분리돼있었던 책임투자 분과 위원들까지 소집한 ’전체 위원회‘에서 표결을 통해 한진칼 및 대한항공에 대한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한 바 있다. 핵심 이슈는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선임 건이었다. 국민연금이 조 전 회장의 이사 연임에 반대표를 던지면서 조 전 회장은 연임에 실패했다. 이를 두고 재계에선 ”수탁위 위원 내에서 사내이사 재선임 반대가 과반이 안되자 전체 회의로 확대해 반대 의견 관철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국민연금법 시행령 개정으로 현재는 수탁위가 9명 위원으로 단일화돼 작년과 같은 전체 위원회를 통한 표결을 불가능한 상황이다.
일각에선 수탁위가 과반수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의결권 방향을 쪼개는 ’불통일 행사‘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수탁위 운영규정에 따르면 수탁위는 위원 3명 이상의 동의를 거쳐 회부된 사안을 안건으로 다룬다. 현재 약 2.9%의 의결권을 찬성 혹은 반대의 한 쪽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찬성 혹은 반대 비율대로 나눠서 행사하자는 안건이 회부돼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을 경우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나눠서 행사할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
상법에 따르면 불통일 행사를 결정한 주주는 주총 3일 전까지 회사에 대하여 서면 또는 전자문서로 그 뜻과 이유를 통지해야 한다. 한진칼 주총이 27일인 점을 감안하면 24일이 불통일 행사가 가능한 시한이다. 한 연기금 전문가는 “주요 의결권 자문사들이 조 회장의 손을 들어주면서 불통일 행사가 논의될 가능성이 적어졌지만 완전히 배제하긴 힘들다”며 “지분율이 크진 않지만 양측이 확보한 지분율이 얼마일지 불확실한 상황이라 국민연금의 결정이 이번 경영권 분쟁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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