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의 장단기 자금조달처인 회사채와 기업어음(CP, 전자단기사채 포함) 시장이 마비 위기에 몰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시중자금이 국고채 등 안전자산에 몰리면서 기업의 자금줄이 막힌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코로나19 피해 업종의 회사채를 중앙은행과 국책은행이 대신 사주는 ‘한국판 양적질적완화(QQE)’ 정책을 정부에 요청하기로 했다.
22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회사채와 CP 금리는 지난 18일부터 동반 급등세(가격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다. 16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에도 ‘사자’ 수요가 갑작스레 사라진 탓이다. 신용등급 ‘A’ 회사채(3년물 기준) 금리는 17일 연 1.94%에서 20일 2.10%로 뛰었다. 같은 기간 CP(91일물) 금리는 연 1.36%에서 1.46%로 사흘 연속 급등했다.
윤원태 SK증권 연구원은 “시장에서 비우량 채권 회피 현상이 본격화됐다”며 “비우량 회사채·CP의 절반가량이 만기 상환에 실패하면서 기업들의 연쇄 디폴트(채무 불이행)나 부도가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올 상반기 만기를 맞는 회사채·CP 물량은 약 78조원이다. 이 중 비우량 채권(신용등급 A 이하 회사채와 A2- 이하 CP)이 28조4595억원에 달한다.
여당은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이 직접 나서도록 정부에 요청할 계획이다. 최운열 민주당 금융안정 태스크포스(TF) 단장은 “미국 중앙은행(Fed)이 CP매입기구(CPFF)를 통해 단기 회사채를 직접 사들이는 것과 같은 충격요법이 한국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자금줄 말라 '급전' 찾는 기업들…'만기 하루짜리 CP' 2兆 넘게 쏟아져
“기업어음(CP)을 사겠다는 수요가 말라버렸습니다.”
한 증권사 CP 운용 담당자는 지난 20일 다급한 목소리로 이처럼 시장 상황을 전했다. “지난주부터 CP 판매에 실패해 증권사가 하루 수백억원어치씩을 떠안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기업들의 장기 자금 조달처인 회사채에 이어 단기 금융 수단인 CP 시장마저 얼어붙으면서 연쇄 부도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말라붙은 기업 단기금융시장
국내 증권사들은 지난주부터 기업들이 발행한 CP 판매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 이후 기업 채권에 대한 ‘사자’ 수요가 뚝 끊긴 결과다. CP 판매 과정에서 미매각 물량이 발생하면 증권사가 전량 떠안아야 한다.
일부 대형 증권사는 주가 급락으로 주가연계증권(ELS) 관련 대규모 파생상품계약 증거금 납입 요구까지 몰린 탓에 급전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19일 증권사들은 만기 하루짜리 CP 2조5000억원어치를 발행했다. 한 증권사의 CP 운용팀장은 “직원들이 인맥을 총동원하면서까지 기관들에 매수를 사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체 CP(전자단기사채 등 포함) 발행 잔액 총 256조원 가운데 절반인 127조원 규모 자산유동화증권(ABCP) 시장도 흔들리고 있다. 만기 도래 물량의 차환(새로 발행해 기존 채권을 상환) 실패가 속출하고 있어서다. ABCP는 정기예금,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채권, 회사채 등을 기초자산으로 발행하는 단기금융상품이다.
장기조달처인 회사채 시장도 급랭
한 해 50조원어치를 소화하는 공모 회사채 시장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달 2000억원어치 회사채 발행에 나선 한국토지신탁이 1650억원의 수요만 모은 것을 시작으로 키움캐피탈, 하나은행, 포스파워 등이 잇달아 수요예측에서 모집액을 채우는 데 실패했다.
발행 일정을 미루는 업체도 속출하고 있다. SK그룹 산업용 특수가스 제조 계열사인 SK머티리얼즈는 다음달 초 100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을 준비했지만, 시장 상황이 급변하자 일정을 연기했다. 비슷한 시기 회사채 발행을 계획했던 대림산업, 동원시스템즈, 한솔테크닉스 등은 아직 발행 시기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신용등급 강등 전망도 기관이 투자를 꺼리는 요인이다.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은 최근 LG화학, SK이노베이션, 이마트, KCC 등 국내 간판 기업 신용등급을 줄줄이 내리고 있다.
상승하는 부도 위험
SK증권에 따르면 이달부터 올해 말까지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37조원)와 CP(79조원)는 약 116조원에 이른다. 비교적 신용도가 낮은 것으로 분류되는 ‘A’등급 이하 회사채와 ‘A2-’등급 이하 CP 물량만 약 43조원이다. 이 중 28조4595억원어치가 상반기에 만기를 맞는다. 기업금융시장 전반에 신용 경색이 확산하면서 기업 부도 우려도 커지고 있다.
기업신용위험을 나타내는 회사채와 국고채 금리 격차(스프레드)는 2012년 이후 8년 만에 최대 수준으로 벌어졌다. 지난 20일 ‘AA-’ 신용등급 3년 만기 회사채 평균금리는 연 1.95%로 같은 만기의 국고채(연 1.11%)와의 격차가 0.84%포인트까지 확대됐다. 2012년 2월 6일(0.85%포인트) 후 최대다. 2012년은 동양·웅진·STX그룹 등의 유동성 위기가 심해지면서 산업계 전반에 부도 공포가 휘몰아쳤던 시기다.
한 증권사 기업금융 담당자는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큰 신용 위기가 올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며 “기업 금융시장의 붕괴를 막을 정책적 대응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했다.
김우섭/이태호/김진성 기자 du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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