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스페인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 감염자가 어제 하루에만 6500명 늘어 총 4만 명에 이르고, 사망자는 2700명으로 늘었다. 스페인 정부가 군대까지 투입하며 국경 통제와 이동 금지, 상점 폐쇄령을 내렸지만 사태는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달았다. 국가의료시스템은 붕괴 직전에 몰렸다.
병원과 요양원에서는 방치된 노인들의 시신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장례식장도 포화상태여서 수도 마드리드의 대형 아이스링크를 임시 영안실로 쓸 정도다. 정부가 은퇴한 의사 간호사 등 5만2000명을 소집하고, 컨벤션센터를 징발해 5500개의 임시 병상을 설치했지만 확산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의료진 감염도 심각하다. 전체 확진자의 13%인 5400여 명이 의사와 간호사다. 의사들은 방호복 대신 쓰레기봉투 비닐을 입고 사투를 벌이고 있다.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은 30년 경력의 간호사는 “슬프게도 우리는 ‘오염의 사슬’이 됐다”고 말했다. 의료진이 감염되자 환자들이 병원에서 집단 탈주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의 공공의료 체계는 무기력했다. 스페인의 병원은 대부분 국·공립이다. 인구 1000명당 병상 수는 3개로 유럽 평균(4.7개)에 한참 못 미친다. 집중치료 병상도 인구 10만 명당 10개로 독일(29개)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인구 8400여만 명인 독일의 확진자는 3만여 명, 사망자는 약 160명이다. 인구가 4700여만 명밖에 안 되는 스페인의 사망자 수는 독일의 16배에 달한다.
위기에 대응하는 정치 리더십도 실종됐다. 코로나 사태가 급속도로 번지던 이달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대규모 축제를 벌이는 등 안일하게 대처하다 파국을 맞았다. 뒤늦게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방역 지원군을 요청하고, 외출금지·상점폐쇄 명령을 다음달 12일까지 연장하기로 했지만 그 사이에 ‘건강 1위국’의 시민들이 줄줄이 죽어나가고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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