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동남아·티베트·일본…아시아 각지로 흩어진 고구려·백제 유민

입력 2020-03-27 17:39   수정 2020-03-28 02:41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군대가 전투에서 패하고, 정부가 괴멸하고, 지배계급이 파멸하는 것을 일컫는 게 아니다. 단순히 삶이 비참해지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파멸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는 선조들처럼 명예를 간직한 채 역사에 남았고, 자의든 타의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유민(流民)’이라는 신분으로 살육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또 자발적으로 망명하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일부는 부활에 성공했다. 한민족의 슬픈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는 사람·집단의 이동)’다.

645년, 고당(高唐)전쟁에서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요동성(遼東城) 전투에서 패배해 군인과 백성 등 7만여 명이 요주(요서·요동) 등으로 끌려갔고, 다시 1만4000명이 유주(幽州·베이징 일대)로 끌려가 정착했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함께 고사계 같은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

669년 5월엔 20만 명(《자치통감》엔 3만8200호, 《구당서》엔 2만8200호)이 끌려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또 679년에는 요동지역의 유민들을 하남(내몽골 오르도스)과 농우(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사람이 2만 명이 못될 정도로 줄었다(지배선, 《고구려 백제 유민이야기》, 2006).


中 대륙 불모지에 분산된 고구려 유민

그럼 당나라는 왜 고구려 유민을 이런 오지로 보냈을까? 첫째, 고구려 유민의 저항과 복국(復國)이 두려워 고국과 멀리 떨어뜨리는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자치통감》은 ‘고구려인들은 반(反)하는 자가 많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복국군들은 북쪽의 안시성 등에서 671년까지, 남쪽에선 673년까지 당군과 전투를 벌였다. 조선왕에 봉해져 요동에 온 보장왕도 유민을 모으고 말갈과 밀통했다가 공주(州, 쓰촨성)로 보내졌고, 남은 유민들은 하남과 농우로 대거 이주됐다.

둘째, 노동력 특히 버려진 땅을 개척하는 노예로 활용하고,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용맹한 고구려 포로를 이용해 또 다른 민족에 대항하게 하는 정책 때문이다. 고구려 포로들이 그 멀고 거친 환경에서 이민족들과 생사를 걸고 전쟁을 벌였던 현장에 가면, 이들의 고난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진다. 그 시기에 당나라는 동서남북으로 안정된 곳이 없었다. 북쪽인 하남에서는 튀르크와 거란을 방어해야 했고, 동쪽에는 이진충이 일시 통일을 이룬 거란이 있었다. 발해 건국군은 산발적으로 공격해왔다.

서남쪽에서는 강력해진 토번(지금의 티베트)이 수도 근처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747년에 고선지가 힌두쿠시의 탄구령을 넘어 세계적으로 위명(威名)을 떨쳤는데, 그가 지휘한 단결병(團結兵) 중 많은 수는 고구려인이었다. 또 실크로드 지역에서는 튀르크계를 방어하면서, 중앙아시아에 진입한 아랍 세력까지 견제해야 했다. 윈난성의 다리(大理)지역을 중심으로 훗날 당의 7만 대군을 전멸시킨 남조국이 성장 중이었다.

이이제이 정책, 불모지 개척에 이용당해

그런데 자유의지로 탈출하거나 망명을 시도한 유민도 많았고, 일부는 부활에 성공했다. 신라로 망명해 대당(對唐)전쟁에 합류했던 부류는 신라인이 됐고, 북만주나 동만주 일대 오지로 탈출한 유민들은 거란·선비·말갈 등 방계종족들에 동화되고 말았다. 지금도 ‘다구르족’ 같은 일부 민족은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는데, 그 시대의 상황과 일부의 설화 및 풍습 등을 고려하면 연해주 북부에도 고구려 유민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한 무리는 이미 진출해 교류했던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늦가을부터는 추위와 강풍 때문에 동해를 건너는 일이 어렵지만, 북서풍을 이용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유민들은 희생을 치르며 동해안의 이시카와현, 니가타현 등에 도착했고, 일부는 다양한 경로로 간사이(關西)·간토(關東)의 여러 지역으로 이동했다. 신(新)일본국은 716년에 간토 지역 7개 군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인 1799명을 모아 무사시(武藏, 사이타마현) 지역에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했다(《속일본기》). 수장은 고구려 사신단의 부사였던 약광(若光)이었는데, 사후에 ‘고려명신(高麗明神)’으로 히다카(日高)시 고마(高麗)신사의 신주로 모셔졌다. 고구려인 정착 1300주년인 2016년에 신사를 방문했더니, 기념행사 때문인지 활기가 넘쳤다. 도쿄만 일대는 고마에촌(江村)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8세기의 거주지, 가마터 등 유적과 많은 신사가 있어 고구려 유민들이 개척한 곳임을 알려준다.

한편, 나라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고구려인들도 있었다. 이정기 일가는 청주, 서주 등 산둥반도와 장쑤성(江蘇省) 일대에 제나라를 세운 후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며 54년 동안 발전했다. 또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에서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성장했다.

탈출해 나라 세우고, 일본에도 건너가

그럼 백제 유민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660년 8월, 실정과 오만으로 저항 한 번 못한 채 항복한 의자왕과 대신들 그리고 죄없는 병사들 1만2800명은 배에 실려 당(唐)으로 끌려갔다. 의자왕과 왕자들, 일부 대신은 당나라의 벼슬을 받았으나, 복국군의 임금으로 고구려로 망명했던 부여풍은 붙잡혀 영남(廣東·廣西지방)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산둥지역에 버려졌던 백성들은 다시 요동으로 이주당했다. 한편 주류성 전투와 백강(백촌강)해전에서 대패한 복국군은 “어찌할 수 없도다. 백제의 이름은 이제 끊어졌고, (조상)묘소에도 갈 수가 없구나…”(《일본서기》)라고 절규하며 음력 9월 25일에 왜(倭)의 병선을 타고 거친 북서풍을 맞으며 대한해협을 건넜다. 뒤따라 백성들과 지방세력도 전라도 해안 등에서 출항해 ‘보트피플’로 떠돌다가 일본열도의 곳곳에 닿았다. 그리고 665년 2월, 400여 명이 오우미(近江) 지역에 분산된 것처럼 여러 곳에서 개척자로 변신했다.

‘보트피플’ 백제 유민도 대한해협 건너

그들은 절치부심하면서 나당(羅唐) 연합군을 방어할 요충지마다 성을 쌓고, 군비를 증강하는 한편 생존을 모색하는 외교를 했다. 670년에 일본국(日本國)이 탄생했다. 왕실 교체 같은 변란과 격심한 정치혼란이 일어났고, 심지어는 유민세력 간에도 전투가 벌어졌다. 1992년 규슈 중부 산골인 난고(南鄕)촌을 방문, 이곳 오지로 도피했다가 중앙에서 파견한 추격군에 살해당한 백제계 정가왕 부자의 흔적을 찾아본 적이 있는데 슬픈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대거 들어온 군인·정치인·지식인·기술자 등의 인적자원은 신흥 일본을 경제적·문화적으로 발전시켜 역사상 최대의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백제의 역사와 뒤섞인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이 출판됐고, 유민들의 족보도 만들어졌다. 또 일본 천황가와 부계·모계로 얽혀 혈연관계는 더욱 강해졌다.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이 거주하는 지역은 ‘구다라군(百濟郡)’으로 명명됐다. 2002년 월드컵 때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칸무(桓武)천황의 어머니는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유민들의 행적과 백제계 출신이 주도한 도다이지(東大寺)나 호류지(法隆寺) 같은 대사찰, 대규모의 방어체제, ‘백제왕 신사’ 등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은 우리가 상실했던 백제역사를 복원해 준다(윤명철,《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1996).

한반도 유민이 ‘日 르네상스’에 큰 역할

만주, 몽골은 물론이고 산둥지역, 시안과 간쑤성(甘肅省) 일대, 신장성(新疆省)의 사막,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와 파미르 고원, 티베트와 칭하이성 및 쓰촨성(四川省) 일대 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지역 그리고 일본의 에도, 규슈, 오사카와 서쪽 해안의 도시들, 심지어는 윈난성(雲南省)과 동남아시아 북부의 산족 마을에도 고구려·백제의 최후와 유민들의 깊은 한이 배어 있다(김병호, 《고구려를 위하여》).

유대인은 2000여 년 동안 고난을 겪으면서도 디아스포라와 정체성을 유지했고, 끝내는 감동적으로 부활했다. 그런데 이 처절한 디아스포라의 존재조차 모르는 우리가 ‘민족통일’과 ‘한민족 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을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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