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 그거 맨정신으로는 무시 못 할 것이더라/ 어느 날 아침 변기에 앉아 바라보면, 억지로 찢어발기거나 태워 버리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을/ 낡은 수건 하나가 제 태어난 날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나 저제나 우리 숨 끊어질 날을 지켜보기 위해 저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씻고 또 씻어야 하는 손이 애물단지가 됐다. 감염의 주범 격이 되면서 우리 몸의 제1열이던 손은 어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처지로 물러났다. 역설적으로 손이 하던 일이 이리 많았든가 깨닫는 계기가 됐다.
조선시대 전신(傳神) 초상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화가 김현철 씨와 나눈 대화 한 자락이 기억난다. 사람 몸 중에서 가장 묘사하기 어려운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엉뚱하게 제일 쉬운 것이 귀신 그리기라 한다. 아무도 본 일이 없어서 맘대로 그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거꾸로 질문을 받았다. 신체 부위 중에서 그리기 가장 까다로운 것이 무엇이겠느냐. 눈일까, 어깨일까 망설이고 있었더니 귀띔을 줬다. 잘 그렸다는 인물화를 떠올려 봐도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고 두루뭉술 넘어간 곳이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답은 발이었다. 그러고 보니 맨발을 제대로 묘사한 그림을 본 기억이 없다.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가 인간이란 경구가 떠올랐다.
화가는 그다음으로 난해한 부위가 손이라 했다. 그도 그럴듯했다. 미술사의 거장들도 얼굴은 근사하게 그려놓고 손은 촌스럽게 마무리한 경우가 꽤 된다. ‘손이 곧 마음’이란 말은 일리가 있다. 손금에 인생이 들어있고, 손바닥 혈맥에 오장육부의 건강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손을 꼼지락거려 뭔가 만들고 성장시키고 이룩해 가는 것은 인류가 문명과 자아를 형성해 가는 과정 그 자체다.
큰 절에 가면 으뜸 부처의 불상(佛像)을 모신 대웅전이 있다. 대부분 부처님상이 손을 두툼한 모양으로 표현했다. 수련이 깊으면 손바닥이 절로 통통해지는데 이런 경지를 장심(掌心)이 열린다고 한다. 불상은 경배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보고 배우라는 교육의 도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손이 다시 보인다. 이제껏 묵묵히 우리 마음을 대변하며 사람살이를 투사하던 손의 재발견이다. 코로나19 사태는 무심히 지나치던 일상의 뒤집기, 세상 다시 생각하기, 만물의 재배치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일종의 ‘깨끗한 손’ 운동의 촉발이랄까. ‘배꼽에 두 손 모으기 전에는 큰소리치지 마라’는 속담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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