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코로나 사태서 드러난 유럽 '선진국'의 민낯

입력 2020-03-30 18:07   수정 2020-03-31 00:16

영국 등 유럽 언론에서 평소 한국 관련 소식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예외는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면 주요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메인 뉴스로 보도한다. 유럽에서 ‘코리아’라고 하면 한국보다 북한을 먼저 떠올리는 현지인도 많다. 한국이 선진국의 척도로 불리는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 인구 5000만 명 이상인 국가) 회원국이며,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현지인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진 뒤 유럽 언론에선 한국 관련 소식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이달 초를 기점으로 보도 내용은 180도 달라졌다. 국내에서 확진자가 급증했던 지난달 말 외신에 비친 한국 모습은 전쟁터 그 자체였다. 코로나19는 동양인이 걸리는 병이라는 인식도 퍼졌다. 유럽 곳곳에서 동양인 혐오로 인종차별이 기승을 부렸던 때도 이 무렵이다.

유럽에서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이달 중순부터 한국을 바라보는 언론들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유럽 각국이 한국의 의료 시스템을 배우겠다고 나섰다. 영국 공영 BBC방송은 매일 서울 특파원을 연결해 한국의 방역 활동을 심층뉴스로 전한다. 가디언, 더타임스, 데일리텔레그래프 등 유력 신문들도 마찬가지다. 하루 2만 명에 달하는 검사 역량과 ‘드라이브 스루’ 확진자 동선 공개 등은 유럽인들에게 신기함 그 자체였다.

선진국임을 자임해 왔던 유럽 국가들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의료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영국에선 호흡 곤란 등 심각한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에게만 코로나19 검사를 한다. 의심 증상이 있다고 해도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만 할 뿐이다. 29일(현지시간) 기준 영국의 누적 확진자는 1만9000여 명이지만, 실제로는 열 배가 넘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국가 의료시스템이 붕괴됐다. 의료장비와 병상이 부족해 고령의 중증환자들은 치료를 포기할 정도다. 강소 선진국의 대명사로 불려온 스위스도 상황이 심각하다. 서울시 인구보다 적은 스위스(850만 명)에서 한국보다 많은 확진자(1만5000여 명)와 사망자(300여 명)가 발생했다.

유럽에선 ‘패닉 사재기’도 기승을 부린다. ‘공급은 충분하다’는 정부 발표에도 생필품은 진열되자마자 동이 나고 있다. 유럽 각국은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외출 금지령과 상점 폐쇄라는 초강수를 뒀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 자유주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펼쳐진 것이다. 마스크를 제외하면 사재기 현상을 찾아볼 수 없고, 자율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한국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유럽에선 코로나19 사태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위기라고 부른다. 바꿔 말하면 전쟁 이후 이렇다 할 큰 위기를 겪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면 6·25전쟁 이후 각종 재난에 익숙해진 한국에선 위기 때마다 성숙한 시민의식이 빛을 발했다. 한국은 우수한 의료시스템에 더해 국민의 공동체 의식과 강한 책임감 덕분에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 유럽 언론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국내에선 여전히 미국과 유럽 등 소위 선진국을 동경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한때 정치권에선 ‘선진화’ 담론이 화두에 오르기도 했다. 경제력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지만 시민의식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미치지 못한다는 ‘자기비하’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닮으려고 애써온 선진국의 민낯을 지금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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