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거장의 어깨 위에서

입력 2020-03-30 17:45   수정 2020-03-31 00:08

누구에게나 삶의 결정적 순간이 있다. 엔지니어로서의 여정을 걷게 한 내 삶의 결정적인 계기는 스무 살, 대학에 발을 디딘 신입생 때 찾아왔다. 1970년대 대학가는 정치적 이슈로 시끄러웠고, 시위와 휴강이 반복되는 상황이 계속됐다. 한 번의 대입 실패를 겪고 입학한 대학생활은 큰 야망도, 꿈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이었다. 197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에사키 레오나 박사의 강연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다는 공지를 들었다.

어릴 적 나의 꿈은 물리학자였다.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아이였고, 새로운 것을 보면 어떻게 동작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 일단 분해부터 하는 통에 수많은 제품을 망가뜨리며 놀았다. 고전역학과 작은 입자들, 특히 현대 물리에 관심이 많아 이 분야와 관련한 책을 끼고 살았다. 하지만 대학 진로 결정을 앞두고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순수 물리학자로는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부모님이 원하는 의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적성에 맞지 않았고, 절충해서 선택한 것이 현대 물리와 가장 가까운 전자공학이었다.

아무런 기대 없이 찾은 강연은 나를 매료시켰다. 일본 물리학자인 에사키 박사는 오사카 근처 시골에서 태어나 노벨상까지 받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시대 상황에 가로막혀 꿈을 접고, 소니에 입사해 운명적으로 반도체 연구를 하게 된 이야기, 연구를 하다가 불순물이 다량 포함된 다이오드에서 최초로 ‘터널링 현상’을 관측해 노벨상을 받은 이야기까지…. 어설픈 물리학도였던 나의 마음에 ‘세계를 향한 더 큰 꿈’을 품는 불을 댕겼다.

에사키 박사에게 편지를 썼다. 물리학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은지, 진로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당돌한 편지에 그는 물리학이나 전자공학이나 원리를 발견하고 연구하는 것은 매한가지니 전자공학에 매진하라고 도움이 될 교재까지 소개해 주며 친히 답장을 보내왔다. 그 덕분에 흔들림 없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고, 이후에도 틈틈이 소식을 주고받으며 미국 유학생활과 기업 근무,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를 하며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을 겸임하기까지 수많은 여정의 이정표가 됐다. 마음의 멘토로서 끊임없이 꿈을 키우는 데 영감을 불어넣어 줬다.

에사키 박사는 ‘노벨상을 타기 위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를 꼽았다. 첫째 자기를 압박하는 과거 경험에 사로잡히지 말라, 둘째 권위 있고 유명한 교수의 그늘에 안주하지 말라, 셋째 필요하지 않은 일에 집착하지 말라, 넷째 도전을 피하지 말라, 다섯째 어릴 적의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던 아름다운 영혼을 잊지 말라. 인생이 깊어지면 철학이 되는 걸까. 진정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던 아름다운 영혼인 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던 건 나의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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