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버냉키와 오바마 '위기 리더십'

입력 2020-04-05 17:18   수정 2020-04-06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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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위기는 1930년대 대공황과 다른 동물이다. 눈 폭풍이나 자연재해에 더 가깝다.” 지난달 말 벤 버냉키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2006년 2월~2014년 1월)이 한 말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의 혼란이 대공황급으로 번지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다. 그는 코로나19가 잦아들면 경기가 빠르게 반등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L자형, V자형, 바닥이 긴 U자형 등으로 경기 전망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버냉키의 예측이 눈길을 끈 건 그가 자타가 공인하는 대공황 전문가여서다. 매사추세츠공대(MIT)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대공황이었고, 교수 때도 ‘대공황과 Fed 역할’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등에 관한 연구로 학계에 이름을 알렸다.

대공황 전문가인 버냉키의 소신

버냉키는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의 ‘구원 투수’였다.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부실 증가→신용경색→리먼브러더스 파산→금융시스템 마비→기업 파산과 대량실업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대공황의 그림자가 아른거리자 버냉키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밀턴 프리드먼의 가르침을 떠올렸다고 한다. “1928년 경기 후퇴기에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야 하는데도 금리를 인상하는 실수를 했고, 그게 디플레이션을 유발시켜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공황이 얼마나 무서운 동물인지, 중앙은행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버냉키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두 개의 길을 동시에 걸어갔다. 기준금리를 재빨리 제로 수준까지 내리고, 더 이상 금리 정책을 쓸 수 없게 되자 양적완화를 시도했다. Fed가 돈을 찍어 시중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채권을 매입해 시중에 자금을 푸는 방식이다. 시장은 환호했지만 ‘헬리콥터 머니’가 나중에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것이란 우려도 비등했다. 정치권은 “양적완화를 중단하라. 당장 해임해야 한다”고 버냉키를 흔들었다. 그런데 인사권자인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임명한 버냉키를 되레 연임시켰다. 버냉키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약 5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총 4조달러 규모의 돈을 풀었다.

전문가에게 힘 실어준 오바마

오바마의 무한신뢰 덕에 버냉키는 대공황 전문가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미국 경제는 ‘대침체(Great Recession)’로 불리는 전후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제롬 파월 현 Fed 의장이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해 재빠르게 제로금리와 무제한 양적완화에 나선 건 버냉키가 남긴 선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바마의 위기 리더십은 ‘GM 구하기’에서 더 빛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9년 파산위기에 몰린 GM이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여론은 싸늘했다. 노조의 과도한 복지 혜택이 국민적 반감을 불러온 탓이다. 미국인 4명 중 3명꼴로 반대했다. 그런데도 오바마는 “GM이 무너지면 미국 일자리도 사라진다”고 설득해 공적자금(500억달러) 투입을 밀어붙였다. GM은 3년 만에 살아났고 미국 제조업 부활의 상징이 됐다.

미국이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전문가로서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버냉키, 전문가를 믿고 힘을 실어준 오바마의 리더십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오바마의 리더십은 올바른 길이라면 욕을 먹더라도 앞장서는 게 국가 지도자의 참모습이라는 점을 보여준 사례로 기억된다.

청와대 눈치를 보는 한국은행, ‘예스맨’이 돼버린 경제부처 장관들, 여론에 휘둘려 갈팡질팡하는 대통령. 이런 조합으로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

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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