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방배동에 사는 직장인 김진아 씨는 요즘 매일 오전 8시55분에 침실 옆방으로 출근한다. 신한은행 콜센터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오전 9시부터 걸려오는 고객의 전화를 받아 은행 서비스 관련 민원을 모두 해결해 준다. 옆방 출근, 즉 재택근무는 한 달 정도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코로나19가 노동시장의 풍경을 바꿔놓고 있다. 근무 형태는 다양해지고 근무 시간도 유연해졌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가 끝난다고 하더라도 이 같은 변화가 근로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확산되는 유연근무제
근무 형태가 바뀐 곳은 민간 기업만이 아니다.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서초구는 지난달 16일부터 ‘트리플 5부제’를 도입했다. 공무원들이 출퇴근 시간과 점심 시간을 다섯 가지 중 하나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는 재택근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2009년부터 생산성 향상을 위해 민간 및 공공부문에 유연근무제 도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해 왔다. 유연근무제는 장소와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해 일하는 근무 형태를 말한다. 신한은행 콜센터는 재택근무, 서초구는 시차출퇴근을 채택했다. 둘 다 유연근무에 포함된다.
정부는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는 중소·중견기업에 1인당 520만원, 인프라 구축에 2000만원까지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시도는 지금까지 빛을 보지 못했다. 규제당국과 노조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금융이 대표적이다. 금융당국은 개인의 금융정보를 집에서 다루면 금융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금융회사 콜센터 직원의 재택근무를 반대해 왔다. 각 금융사가 별도 보안 인터넷망과 USB(이동저장장치) 사용이 불가능한 전용 단말기를 설치한 뒤에도 쉽게 허용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신한은행에 이어 삼성생명의 콜센터 직원 재택근무를 인정했다.
업무·급여 지급 방식 바뀐다
재택근무를 중심으로 한 유연근로제 확대는 주 52시간 근로제를 비롯해 노동시간을 중심으로 한 규제가 힘을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회사 바깥에서 개인 사정에 맞춰 자유롭게 업무를 하는 만큼 근로시간의 시작과 끝을 규정하기가 어려워져서다. 이에 따라 일한 양을 평가하는 기준도 근로시간이 아니라 해결한 과업의 숫자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유연근무제를 경험한 기업이 늘면서 외주를 주는 업무의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회사 밖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업무 효율을 낼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외주 범위가 마케팅과 인사, 총무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관련 플랫폼 운영사인 업워크는 최근 추가 채용에 나섰다.
근로자 급여 지급 기준도 시간이 아니라 성과를 중심으로 바뀔 전망이다. 재택근무 등을 통한 회사와 직원 사이의 업무 소통 과정에서 회사 측 요구사항과 직원의 업무 실행 내역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연공서열을 중심으로 급여를 책정하는 연봉제는 몇 년 안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이 같은 변화 과정에서 노동계의 반발이 예상되지만 큰 힘을 얻지는 못할 전망이다.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필요에 따라 노동시장 및 관련 시스템에 새로운 질서가 부여되고 있어서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정부가 방역업체와 마스크 제조업체 등을 특별연장 근로 업종으로 지정한 것에 대해 양대 노총이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큰 이목을 끌지 못한 것이 단적인 예다. 1998년 외환위기 수습 과정에서 파견 및 구조조정 관련 법안 입법에 노동계가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코로나19로 ‘일어나는 산업’에는 더 많은 인력이 효율적으로 일하게 하고, ‘저무는 산업’의 근로자들이 그쪽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여기에 맞춰 기존 규제와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그 국가는 도태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코로나19로 노사 대타협 이뤄지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대립과 반목 관계였던 노조와 사측의 관계를 바꿔놓았다. 금융위기 여파로 기업 여건이 악화하자 대량 실업 우려가 커졌다. 2009년 2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합의가 이뤄졌다. 노동계는 파업을 자제하고 임금 동결은 물론 반납까지 감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경영계는 해고를 자제하며 부당노동행위를 없애기로 했다. 정부 역시 일자리 유지 및 나누기 노력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이런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우선 조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 등을 들어 유연근무제 확대에 반대했던 노조의 입장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 10일에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제안으로 항공업계와 호텔업계 노사 및 정부 간담회가 열렸다. 회사가 최대한 고용을 유지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 임단협 연기 등 사회적 타협 가능성이 논의됐다. 회의에 참석했던 관계자는 “근로시간 단축과 조정 등 유연근무제 도입에 대한 반대를 노조가 내려놓을 수 있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올 1월 첫째 주만 하더라도 고용노동부에 유연근무제 지원금을 신청한 근로자는 6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국내 확산이 본격화된 2월 마지막 주 2933명까지 늘더니 4월 첫째 주에는 5685명에 이르렀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외부에서 나타난 위기에 따른 난관을 기업이 극복하기 위해 노사가 힘을 모아야 한다”며 “가장 시급한 과제인 고용 유지를 놓고 노사가 대타협 등 여러 논의를 통해 묘안을 짜내고, 정부는 조정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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