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식시장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주가 방어를 위한 자사주 매입 발표를 이어가고 있다. 배당 확대와 같은 주주가치 환원 요구가 많았던 데다 정부가 나서 자사주 매입 규제까지 풀어주면서 과거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통 큰’ 자사주 매입이 쏟아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주가가 폭락해 있어 ‘자사주 매입=주가 상승’ 약발도 어느 때보다 잘 먹히고 있다. 주가 변동성이 커질수록 자사주 매입에 거금을 들이는 기업들이 잇따를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비상시국에서 중장기적으로 볼 때 대규모 자사주 매입이 반드시 주주가치 환원 차원에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주주 불만 잠재울 유일한 카드”
한국가스공사는 13일 5.72% 오른 2만6800원에 장을 마쳤다. 지난 10일 장 마감 후 500억원 규모(약 204만 주) 자사주를 취득하겠다고 발표한 영향이다.
이날 코스피지수가 2% 가까이 떨어졌지만 ‘통 큰’ 자사주 매입을 발표한 포스코는 1.69% 상승한 18만1000원에 마감됐다. 3거래일 동안 12.4% 뛰었다. 최정우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우리사주를 사들인 시점(3월 23일)과 비교하면 3주 만에 31.2% 급등했다.
상장사들은 주주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는 방안으로 ‘자사주 카드’를 선호하고 있다. 현금이 넉넉한 기업이라면 가장 빠르고 쉽게 주주가치 환원에 나설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숫자가 이를 증명한다. 이달까지 자사주 매입 공시를 한 기업은 374곳, 이미 작년 수치(253곳)를 넘어섰다. 이나예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경영자는 주가안정 효과와 함께 주주 환원 전략을 실천하고 경영 상태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등 원하는 목적을 한 번에 이룰 수 있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통 큰 베팅 효과는 글쎄…
통 큰 자사주 매입도 코로나19 장세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LG상사는 시가총액의 28%에 달하는 자사주를 매입한다는 발표했다. 포스코의 자사주 매입 규모도 전체 지분의 6% 수준에 해당한다.
코로나19 영향으로 기업들은 현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상황에서 우려 섞인 시각이 나오고 있다. 올 실적 전망이 어두운데 올해 주주들에게 돌아갈 배당이 크게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있다.
일각에서는 대기업들의 과도한 정부 눈치보기가 일부 작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고위 관계자는 “자사주를 대량 매입한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정부를 의식하는 게 아니냐는 합리적 의구심도 제기할 수 있다”며 “자사주 매입 효과로 주가를 떠받치는 기간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사주 매입을 놓고 뒷말도 무성하다. 관련 소식이 전해지기 전부터 주가가 급등하면서 ‘공시 정보 유출’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포스코는 자사주 발표 전에 이미 8.21% 올랐다. 대형주라는 걸 감안했을 때 순환매라 보기엔 상승폭이 너무 크다는 게 시장 반응이었다. 이날 개인이 272억원어치를 순매도하는 동안 기관은 255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공시 후 첫 거래일인 이날 상승폭이 기대에 못 미친 이유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자사주 매입 호재가 이미 반영된 듯한 주가 흐름”이라고 했다.
박재원/고윤상 기자 wonderf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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