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기업경영의 절대 가치는 효율성이었다. 저비용 국가로의 생산기지 집적화(클러스터), 대량 생산, 재고 최소화 등을 통해 ‘비용과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기업 경영자의 최고 덕목으로 평가됐다. 기업 경영은 코로나19 이후 변하고 있다.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사슬이 순식간에 붕괴되는 것을 보면서 효율성 이면에 가려진 ‘위험(리스크)’이 부각되면서다.
위험 관리가 최우선
코로나19 시대 기업들은 앞다퉈 현금 비중을 높이고 있다. 영업활동 중단으로 인해 자금이 언제 부족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들도 평소에는 쳐다보지 않던 기업어음(CP) 시장을 최근 들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부 대기업은 CP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기업의 성쇠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이 ‘현금’이라는 것을 코로나19 쇼크를 통해 기업 경영자들이 몸소 느끼고 있어서다.
박남규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적어도 6개월 이상 버틸 수 있는 현금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것”이라며 “삼성전자처럼 일정 수준 이상의 사내유보금을 항상 갖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영 전략’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 상시적으로 사업 포트폴리오 개편을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의 케빈 스니더 글로벌 매니징컨설턴트(파트너)는 “기업은 ‘필수 설비’와 ‘꼭 필요하지 않은 설비’를 구분하고 매각하는 등 사업 효율성을 높일 것”이라며 “리더들은 진정한 고정비와 변동비를 재고하는 데 시간을 할애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공급망 전략 재검토
공급망관리(SCM) 분야에서도 변화가 두드러질 전망이다. SCM은 부품 조달, 생산, 유통, 판매 등 전 과정을 연계해 최적화하는 경영 시스템이다. 코로나19 이전까지 SCM 전략의 가장 큰 목표는 시간과 돈을 절약하는 것이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지금까지 SCM은 저비용 국가의 대규모 공장에 생산을 집중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이후엔 SCM의 기본 뼈대가 바뀔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맥킨지가 지난달 시행한 설문에 따르면 다국적 기업 임원 1152명 중 87%가 “3년 내 (SCM 관련) 전략을 바꿀 것”이라고 답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분산된 공급 체인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기업가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효율성을 다소 낮추더라도 안정성 비중을 높이는 ‘위험관리형 경영’이 부각될 것이란 얘기다. 김원준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은 “기업 경영 방향이 덜 효율적이더라도 덜 위험한 쪽으로 전환될 것”이라며 “상대적으로 더 적은 부를 창출하는 경제로의 변화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공급처는 2개 이상 선정
위험관리 경영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떨까. 지역 내 ‘더블 생산체제’를 구축하는 글로벌 기업이 증가할 것이란 의견이 우세하다. 지금까지 글로벌 기업들은 각각의 지역거점을 뒀다. 인접한 두 국가에 생산거점을 따로 마련하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시설 인가, 관리 등과 관련해 두 배의 비용이 들어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앞으론 분산이 대세가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예컨대 말레이시아에 화학공장을 세운 기업이 태국이나 베트남에도 비슷한 생산기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틱 판트 BCG 데이터연구가는 “기업들이 위기 때 시스템의 복원력을 중시하고 공급망을 분산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며 “일부 저비용 지역에서 아웃소싱과 생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사슬에 더 많은 중복성을 구축할 것”으로 전망했다.
소재·부품 조달처 역시 복수로 선정하는 게 당연시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산 부품에 의존하던 기업들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현재까지 생산 차질을 겪고 있다. 중국산 와이어링하네스 공급이 끊기자 공장을 세워야 했던 현대자동차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제한 조치 때문에 복수 공급처 확보의 중요성을 절감한 한국 기업들의 움직임이 더 빨라질 전망이다.
생산시설 본국 귀환 ‘리쇼어링’ 촉진
부품 조달, 생산, 유통 등에서 ‘지역 블록화’가 더 강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중국에서 생산한 부품을 헝가리에서 조립해 프랑스에 납품하는 식의 ‘SCM의 세계화’가 약해진다는 얘기다. 대신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서유럽 동유럽 등 특정 지역 내에서 모든 것을 완성하는 로컬라이제이션이 진행될 것이란 관측이다.
이런 추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와 자국우선주의의 영향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이동 제한과 자급자족 추세 때문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분석된다. 맥킨지는 “부품 구매와 생산이 소비자를 향해 더 가까이 이동하면서 ‘공급사슬 세계화’의 시기는 저물 것”으로 예측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상근자문위원도 “각국의 경계선이 약간 강화되면서 기업들은 소비 지역에서 직접 조립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리쇼어링으로 불리는 생산시설의 본국 귀환이 촉진될 것이란 예상도 힘을 얻고 있다. 손쓸 틈도 없이 해외 생산시설이 줄줄이 셧다운되는 것을 경험한 기업들이 핵심 자원을 좀 더 통제하기 쉬운 자국으로 이동시킬 것이란 얘기다. 이 자문위원은 “핵심 인적·물적 자원을 본국에 두고 5세대(5G) 이동통신 같은 빠른 네트워크를 이용해 해외 생산시설을 통제하는 경영 방식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특별취재팀
박준동 경제부장(팀장), 노경목 경제부·안재광 생활경제부 차장, 최진석 건설부동산부·황정수 산업부·강현우 국제부·김주완 IT과학부·이지현 바이오헬스부·정소람 금융부·임근호 증권부·강진규 경제부·김남영 지식사회부 기자, 강경민 런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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