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이 끝나더라도 세계는 이전과는 전혀 같지 않을 것이다.” 외교가의 거물인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4일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을 통해 내놓은 진단이다.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세계는 코로나 이후(AC: After Corona)와 이전(BC: Before Corona)으로 나뉠 것”이라고 예측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코로나19의 파급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함의는 동일하다.
코로나19가 바꿔 놓은 경영 환경
코로나19는 기업 경영 환경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전망이다. 일시적으로 매출과 이익이 급감하는 것은 변화의 일부에 불과하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시장과 소비자가 달라지고 있어서다. 앞으로 기업들은 어떤 제품과 서비스를 팔지, 어떤 원칙에 기반해 의사 결정을 해야 할지 등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전문가들 예측은 다양하다. 효율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는 관측이 많다. 코로나19와 같은 천재지변이 수시로 닥친다는 전제 아래 경영 계획을 짤 것이란 분석이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기업 경영에 접목하려는 시도도 곳곳에서 이어질 전망이다. 위기의 징후를 발 빠르게 포착해 대응하기 위해서다. 사람 직원 대신 전염병에 안전한 로봇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국내 주요 기업들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AC 시대’를 준비하고 있을까. 대다수 기업은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앞세운다. ‘BC 시대’를 주도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미래 먹거리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틀을 깨는 혁신이라고 본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달 25일 경기 수원 삼성종합기술원을 방문해 “국민 성원에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길은 혁신”이라고 강조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한 달 넘게 재택근무하면서 많은 점을 느꼈다”며 “체계적인 워크 시스템으로 정착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기술 격차 벌리고 조직은 유연하게
삼성의 ‘AC 시대’ 전략 핵심은 초격차다. 경쟁사들과의 기술 격차가 충분히 벌어지면 코로나19로 인한 돌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게 경영진 판단이다. 미세공정 기술을 앞세운 삼성전자의 반도체가 대표적인 사례다.
삼성전자는 최근 극자외선노광장치(EUV) 공정을 적용해 4세대 10나노급(1a) D램(DDR5, LPDDR5) 양산 체제를 갖췄다. EUV 공정을 D램 분야로 확장한 첫 사례다. 빛의 한 종류인 EUV는 반도체를 생산할 때 웨이퍼 위에 선로를 그리는 노광 공정에 활용된다. 빛의 파장이 좁아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다. 회로 폭이 좁아지면 칩 크기가 더 줄어든다. 삼성은 기존 ‘캐시카우’인 메모리 반도체 외에도 AI, 로봇, 시스템 반도체 등을 차세대 먹거리로 밀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주행 성능과 디자인을 앞세운 신차와 수소차를 비롯한 신기술로 코로나19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1월 공개한 제네시스의 첫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GV80를 살펴보면 현대·기아차의 지향점이 보인다. 이 차엔 깜빡이를 켜면 차로를 스스로 바꾸는 기능과 증강현실(AR) 내비게이션 등 최첨단 기술을 대거 적용했다. 신기술을 통해 소비자가 느끼는 가치를 끌어올리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LG의 지향점도 비슷하다. 경쟁 업체보다 한발 앞선 제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여 소비자 선택을 이끌어낸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특히 가전제품에 빅데이터가 연계된 AI를 더한 스마트 가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커넥티드 카 등 집 안팎의 경계 없이 일상생활을 스마트하게 즐길 수 있도록 AI 솔루션을 구축해 소비자에게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기존 방식을 고집하는 게 가능하지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지난 1일 안전과 업무 효율을 동시에 고려하는 ‘스마트워크’ 체제를 도입한 SK(주)가 대표적이다. 시간제를 원칙으로 전체 구성원이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각자가 근무시간을 설계할 수 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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