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말에 한경에세이 필진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논문이나 시론도 아니고 전혀 써보지 않았던 에세이라니. 아무래도 어려울 듯했다. 니버의 기도문을 생각하며 지혜를 구했다. 고민하던 중 몇 달 전 대학 동기 A가 보낸 문자가 문득 생각났다. “신문에서 네 칼럼을 가끔 읽어. 그런데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시론은 딱딱해서 끝까지 안 읽어. 너도 나이가 들었으니 이제 인생, 자연, 사랑, 이런 것들에 관해서 써봐라.” 용기를 내서 도전해보기로 했다.
에세이 쓰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초안은 자꾸 내 주장을 하며 가르치려는 논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론으로 흘러갔다. 에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수정을 하고 나면 도로 시론이 되곤 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에세이 글감을 찾으며 오래전에 본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존 키팅 선생님의 유명한 말이 생각났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이 모두가 고귀한 것이고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목적이다.” 젊었을 때는 이 말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공부를 하고 커리어를 쌓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고 시간은 내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삶을 유지하는 데만 온 힘을 쏟아왔고, 그러면 성공한 인생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글도 생업을 유지하는 전공에 관한 글만 써왔다. 진정 중요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내 마음속에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지난 세월을 길었던 전반이라고 생각하니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에세이를 썼던 요즈음은 하프타임이다. 많은 경기에서 승패는 하프타임을 얼마나 잘 사용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늦었지만 삶의 유지와 삶의 목적, 이 둘을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진다. 전반보다는 짧게 남아있는 후반엔 그간 잊고 지낸 삶의 의미를 찾아 인생의 문을 활짝 열어 보고 싶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