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故人)은 1960년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차관과 장관,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과 장관을 지낸 경제 관료다.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9년3개월 동안 박정희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일하면서 고속 성장기 한국의 산업화 정책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회장은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충남 논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19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초 김 회장은 당시 한은 내 최초의 현상논문인 ‘우리나라 발권제도를 논함’을 썼다. 1953년 1차 화폐개혁 과정 전반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차현진 한은 인재개발원 교수는 “(당시) 화폐 분야 최고의 이론가였다”고 평가했다.
김 회장은 생전 인터뷰에서 1차 화폐개혁에 참여한 경력 덕분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김 회장은 숙정 대상인 구(舊)정권 인물이었지만 2차 화폐개혁을 준비하던 박 전 대통령이 화폐개혁 관련 브리핑을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김 회장은 1962년 38세의 나이에 재무부 차관에 올랐다. 2년 후엔 상공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재무부 장관(1966년)과 상공부 장관(1967년)을 차례로 지내면서 1960년대 공업화 정책을 이끌었다.
상공부 장관이던 1969년, 김 회장은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비서실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서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닙니다”라고 거절 의사를 전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라는 박 전 대통령의 설득에 비서실장직 제의를 수락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9년3개월 동안 비서실장을 지낸 역대 ‘최장수 비서실장’이다.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면서 1970년대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등을 이끌었다. 화려한 경력과 막강한 권력에도 그는 ‘조용한 비서실장’으로 유명하다. “국민이 청와대를 볼 때 비서관이 보여선 안 된다”라는 소신을 강조하면서 취임 직후 비서실 규모 축소에 앞장서기도 했다. 비서실 인사의 언론 인터뷰나 대외 강연을 금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일 대사를 마지막으로 1980년 공직에서 물러난 김 회장은 박 전 대통령의 과오를 부인하지 않았다. 유신 과정에 있었던 문제는 인정하면서도 박 전 대통령의 경제 성과를 축소·왜곡하는 주장에 대해선 회고록을 통해 끝까지 맞섰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을 맡은 이유이기도 하다.
빈소는 서울 일원동에 있는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 14호실, 발인은 28일 오전 8시30분이다. (02)3410-6923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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