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위기…WM 시장이 무너진다

입력 2020-04-28 17:30   수정 2020-10-13 18:49

2018년과 2019년 은행 프라이빗뱅커(PB)들은 쉴 새 없이 사모펀드를 팔았다. 최소 투자금액을 10억원으로 올려도 펀드에 가입하려는 투자자가 줄을 섰다. 하루 1000억원 넘게 팔린 펀드도 있었다. 금융 자산관리(WM·wealth management) 시장은 초호황을 누렸다.

‘라임 사태’는 모든 걸 바꿔놨다. 초저금리에도 은행과 증권회사는 신규 상품을 내놓지 않고 있다. PB들은 개점휴업 상태다. 사모 대체투자 펀드가 잇달아 부실한 것으로 밝혀지자 고객들은 이탈하고 있다. WM 시장이 붕괴 직전의 위기에 놓였다.


28일 금융감독원과 업계에 따르면 부실한 것으로 드러난 사모 대체투자 펀드 규모가 4조원을 넘는다. 지난해 터진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7950억원)와 라임 펀드(1조6679억원)는 이 중 일부일 뿐이었다. 호주 부동산(3264억원), 독일 헤리티지(5300억원), 디스커버리(2000억원), 이탈리아 헬스케어(1800억원) 등 수많은 펀드가 부실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모두 연 5% 안팎의 수익을 안정적으로 돌려준다던 사모 대체투자 상품이다. 대부분 투자 대상의 실체가 불분명한 ‘불량’이거나, 코로나19로 피해를 보면서 부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 상품을 많이 판 금융그룹들은 사태 수습에 전력을 쏟고 있다. 4조원 가운데 3조원어치가 4대 금융그룹에서 팔렸다. 신한금융그룹(1조1042억원)에 이어 우리금융(7811억원) 하나금융(7326억원) KB금융(3747억원) 순이다. 한 은행 부행장은 “고객들이 등을 돌리면서 주요 금융그룹 WM본부가 사실상 사태를 수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큰손 자산가들이 WM센터 발길을 끊자 PB들도 크게 동요하고 있다”고 전했다. 개인투자자의 사모펀드 판매 잔액은 지난달 21조8659억원으로, 작년 6월(27조258억원) 이후 5조2000억원가량 줄었다.

금융회사들은 사모펀드 활성화 정책이 나오자 검증 없이 상품을 팔고 1%(100bp) 넘는 선취 수수료만 챙겼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투자자들은 잇달아 소송을 제기하거나 준비 중이다. 금융회사들은 선지급 형태로 피해를 보상하는 안을 마련하고 있다. 전체 보상금은 부실 펀드 규모의 절반 수준인 2조원 정도가 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수수료 탐욕'이 부른 대체투자 부실…'큰손'들 WM시장 떠난다

이영창 신한금융투자 사장은 한 달 전 취임한 뒤 매일 오후 부실 펀드 상황을 보고받는다. 라임 펀드처럼 투자자 피해가 현실화된 펀드뿐 아니라 잠재적 부실 징후가 있는 펀드까지 점검한다. 자산관리(WM)본부는 수습 대책반 역할을 하고 있다. 신한금융투자는 라임 펀드뿐 아니라 독일 헤리티지 펀드 등 부실 펀드를 유독 많이 팔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구원투수’로 등판한 이 사장의 첫째 미션이다. 다른 시중은행 및 증권회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큼 부실 사모 대체투자 펀드의 파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높은 수수료를 좇느라 금융산업의 핵심 경쟁력인 ‘신뢰’를 잃어버린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금융그룹에서 부실펀드 집중 판매

부실 사모 대체투자 펀드 규모는 대략 4조원이다. 이 가운데 절반가량인 2조748억원이 은행권에서 팔렸다. 우리은행이 7811억원으로 가장 많고 하나은행(7136억원), 신한은행(3995억원) 등 순이다. 증권 계열사를 포함하면 4대 금융그룹 판매액은 2조9926억원으로 전체의 74.8%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까지 ‘비이자이익’ 경쟁을 벌인 결과라는 게 금융계의 평가다. 은행들은 과거 이자로 이익을 냈다. 저금리로 예대마진이 줄자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냈다. 펀드 판매가 대표적이다. 그 결과 작년 은행권 비이자이익은 2018년에 비해 1조원 늘어난 6조6000억원에 달했다. 이 중 약 79%(5조2000억원)가 펀드 판매수수료 등 수수료 관련 이익이었다.

사모펀드는 은행의 구미에 딱 맞는 상품이었다. 공모펀드와 달리 각종 규제에서 자유롭고, 판매사에 돌아가는 수수료율도 높다. 은행들은 라임 펀드를 팔면서 원금에서 평균 1%가량을 선취수수료로 떼갔다. 독일 헤리티지(2.8%) 등 일부 사모펀드는 판매수수료율이 2%를 넘었다. 여기에 운용수수료와 판매사보수도 따로 떼어갔다. 일선 지점에는 “위험도가 높은 주식이나 파생상품이 아닌 안정성 높은 기업 채권 또는 부동산 등에 투자해 연 5%가량 수익을 보장하는 상품으로 홍보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판매에 열을 올렸다. 은행권 사모펀드 판매액은 2015년 말 14조원에서 지난해 7월 말 29조원까지 늘었다.

수수료만 챙기고 상품 검증은 안 해

은행들이 높은 수수료에 따르는 의무는 다하지 않았다. 펀드 실사와 사후 관리에는 손을 놓았다. 대체투자 펀드가 상품제안서와 달리 엉뚱하게 운용돼 투자자 피해를 초래하는 일이 터지고 있는 이유다. 한 증권사 퇴직 임원은 “대규모로 펀드를 팔았지만 어디에 투자했는지 현장실사를 나간 것은 부실 문제가 터진 이후였다”고 말했다.

하나은행이 작년에 판매한 이탈리아 헬스케어 채권에 투자하는 사모펀드는 “이탈리아 정부가 망하지 않는 한 안전하기 때문에 전세금을 넣어도 괜찮다”고 했던 상품이다. 실사 결과 가치는 39~58%밖에 남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현지 운용사는 만기를 훨씬 넘겨 10년간 돈을 받지 못한 부실채권을 비싸게 편입하기도 했다.

부실 가능성을 인지했지만 판매를 강행한 사례도 있었다. 우리은행은 지난해 2월께 라임 대체투자 펀드에서 부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라임 측과 실랑이를 벌이며 4월 초까지 해당 펀드를 계속 팔았다. 우리은행은 독일 등 해외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면 DLF(파생결합펀드)에 전액 원금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내부 경고도 묵살했다.

라임 등 부실펀드에 총수익스와프(TRS) 대출을 제공한 금융지주 계열 증권사들도 도마에 올랐다. 신한금융투자와 KB증권 등 금융지주 계열 증권사는 라임 펀드에 약 6000억원의 TRS 대출을 지원해 투자자 피해를 키웠다. 지난해 KB증권은 라임펀드에서 130억원, 신한금투는 89억원의 TRS 수수료를 챙겼다.

내부 통제기능도 작동하지 않았다. 라임 무역금융펀드 관련 사기 혐의로 이달 구속 기소된 신한금융투자 임모 전 프라임브로커(PBS) 본부장은 사내에서 견제받지 않는 ‘황태자’로 군림했다. 리스크관리 연관 부서들도 임 본부장의 탈선을 막지 못해 사태를 키웠다. 신한금융의 TRS를 포함한 라임 무역금융펀드 위험노출액(익스포저)은 8600억원까지 치솟았다.

조진형/오형주/이상은 기자 u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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