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궁금증은 참지를 못한다. 그 때문에 고민에 빠질 정도였다. 도대체 나는 어떤 성격을 가졌을까? 내가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한 ‘한민족’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을까?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요즘엔 더욱 천착할 수밖에 없는 주제다.
한민족이 흉포하거나 사대적이라는 외국인의 시선
중국인들은 <삼국지> 동이전 등에서 ‘고구려인은 성질이 흉포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 좋아한다, 심지어 말투가 천하다’라고 전했다. 일본인들은 우리의 의식을 교란시키고 길들이기 위해 한민족의 본성을 작위적으로 규정하고 세뇌시켰다. 식민사관에 따르면 우리는 늘 사대적이었고, 당파성이 강했고, 주변부적인 존재였다.
스스로는 ‘정이 철철 흘러넘치고, 한(恨)을 지닌 민족’이며 ‘판소리와 창·춤·동양화 등은 민족문화에 내재한 한을 승화시킨 예술’이라고 자찬하기도 한다. 조선 미학의 스승처럼 모셔지는 세키노 다다시와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한 ‘애상’ ‘비애의 미’ ‘원한’의 영향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고 부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인데도 우리 머릿속을 점령했다.
설사 맞는다 해도 그것은 조선시대의 ‘이상(異常)현상’이지, 전 시대에 일관된 문화이자 정서는 아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남녀 모두 수의(장례를 위해 고인에게 입히는 옷)를 만들어놓고 살며, 낙천적이고 당당했다. 춤사위는 자유롭고 호방했으며, 여백의 미와 정적인 미를 중시한 수묵화가 아니라 화려하고 동적인 채색화를 그렸다.
조선시대·일제강점기만으로 부정적 이미지 강요당해
‘은근과 끈기’라는 말이 교과서에 실리면서 이 또한 언제부터인가 민족성으로 자리잡아버렸다. 식민지 상태와 동족상잔의 고난에서 막 벗어나 매일 허기와 싸워야 했던 시절에는 나름 의미있었지만, 역시 사실은 아니다. 우리 민족은 원래 급한 데다 ‘흥’과 ‘신기’가 충만하다는 사실은 이제는 누구나 인정하지 않는가. ‘평화를 사랑한 민족’이라는 관념도 널리 퍼져 있다. 무려 1000회 가까이 침략을 당해왔어도 한 번도 침략한 적이 없다는 자랑인데, 피지배자의 서글픈 항변이고, 약자의 자기 확인으로 비춰지는 것은 웬일일까? 남들이 평가하듯 우리가 너그럽고 점잖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평화만을 사랑한 바보였을까?
우리가 배워왔고, 아직껏 느끼는 우리 문화와 민족성은 왠지 모르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자연환경론조차도 부정확한 사실에 근거하고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땅이 좁고 인구가 적은 소국이니까 대국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以小事大) 자기합리화까지 했다. 일본인들은 ‘반도적 성격론’을 들고 나와 고대부터 중국의, 남쪽에서는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고 가르쳤다(임나일본부설). 야나기 무네요시는 대륙의 무서운 북풍 때문에 조선은 고난의 역사가 됐다고 안타까운 말투로 우리를 규정했다.
이 주장들의 문제점은 많다. 사실이 아닌 경우도 많지만,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전체 역사가 아닌, 비교적 덜 긍정적인 조선시대와 어두운 일제강점기만으로 민족성을 만들어냈고 강요했다. 실제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소위 민족성에 해당하는 좋은 몇 가지 성격들을 갖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윤명철 저 <다시보는 우리민족> 참고)
유목·해양·농경문화 융합된 탐험정신이 우리 민족성
우선 민족성의 가장 큰 특성으로 ‘탐험정신’을 꼽는다. 탐험은 유인원을 인류로 변환시킨 동력이다. 또한 역사의 원동력임은 서양의 발전이 증명한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동아시아도 역동적인 유목문화와 해양문화, 숲문화, 농경문화들이 만나 탐험정신이 넘실대는 곳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우리 민족이 있었다. 신석기시대부터 우리 땅을 목표로 광대한 유라시아 세계의 8개 이상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이 출발했다.
사람들은 새 것을 좋아하는가 하면(네오 필리아), 동시에 두려워하는 속성도 있다(네오 포비아). 그런데 개인이 아닌 집단이 운명을 내맡긴 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신천지를 찾아간다는 것은 탐험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험난한 대장정의 도중에 일부는 질병과 고통, 전쟁과 죽음, 좌절감으로 실패했고 대다수는 중도에 멈췄다. 그래도 끝까지 여정을 성공시켜 이 터에 정착한 탐험가들은 한민족의 뿌리를 이뤘다. 그 후예들은 안주하지 않고 대륙과 해양으로 다시 진출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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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에는 동아시아도 역동적인 유목문화와 해양문화, 숲문화, 농경문화들이 만나 탐험정신이 넘실대는 곳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우리 민족이 있었다. 신석기시대부터 우리 땅을 목표로 광대한 유라시아 세계의 8개 이상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이 출발했다. 이 터에 정착한 탐험가들은 한민족의 뿌리를 이뤘다. 그 후예들은 안주하지 않고 대륙과 해양으로 다시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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