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면 협력사부터 챙기는 대기업 CEO

입력 2020-04-30 17:26   수정 2020-10-13 19:07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은 매일 아침 출근과 동시에 세계에 퍼져 있는 협력업체 상황부터 챙긴다. 권 회장은 “유럽 협력업체 공장 한 곳의 부품 조달이 끊기면 선박 제조공정 전체가 멈춘다”며 “업무의 절반은 협력사 관리”라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공급망관리(SCM)가 기업의 최대 리스크로 떠오르면서 만년 ‘을’이던 협력업체의 위상이 달라졌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3월 동반성장실을 대표이사 직할조직으로 격상했다. 최고경영자(CEO)가 협력업체 관리업무를 진두지휘한다는 의미다. 권 회장은 매주 울산사업장 간부들과 화상회의를 열어 협력업체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있다.

삼성전기도 최근 구매팀장 밑에 있던 상생협력팀을 임원이 이끄는 조직인 상생협력센터로 승격시켰다. 회사 관계자는 “SCM 생태계 붕괴를 막기 위해 전사적인 지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CEO의 최우선 관심사항”이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 SK하이닉스 등은 유동성 문제가 생긴 협력업체에 긴급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상생펀드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회사의 상생펀드 기금만 4조원에 달한다. 전문가들을 급파해 생산공정 효율화를 돕는 작업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전략을 다시 짜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중국산 부품 의존도가 높은 현대차 등 완성차업체들은 베트남 등에 대한 투자를 늘려 부품 조달 창구를 다양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회계컨설팅기업인 EY는 최근 보고서에서 “SCM이 기업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유사시에 대비한 공급망 다변화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이후 협력업체 관리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며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산업생태계 관점에서 공급망 전략을 짜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현대重, CEO가 상생조직 챙기고…LG전자, 스마트팩토리 지원

27억 명. 지난달 국제노동기구(ILO)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실직하거나 근로시간이 줄어든 것으로 추산한 전 세계 근로자 수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 멈춰서자 부품을 공급받지 못한 업체들이 잇따라 가동을 중단한 영향이 컸다. 블룸버그통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가동 중단”이라고 표현했다.

코로나19 리스크에 놀란 기업들이 공급망관리(SCM) 재편에 나섰다. 협력사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공급처를 늘리는 방식으로 위험을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SCM은 부품 조달부터 판매까지 과정을 연계해 최적화하는 경영 시스템이다.


협력업체 ‘해결사’ 자처

현대중공업은 지난 3월 동반성장 담당 부서를 대표이사 직할로 격상하고, 확대 개편해 동반성장실로 재탄생시켰다. 3개 부서 70여 명이 소속된 대규모 조직이다.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 회장이 조직개편을 직접 지시했다. 과거 사회공헌활동 수준에 머물던 상생협력 조직을 기업의 리스크 관리 조직으로 전환한 것이다. 조선업은 협력사가 생산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

삼성전기도 지난달 구매부서 아래에 있던 상생협력팀을 임원급 조직인 상생협력센터로 승격시켰다. 책임자로는 글로벌기술센터장을 맡아 사내 제조 혁신을 이끈 이갑수 상무를 임명했다. 회사 관계자는 “사내 제조 과정 생산성을 높인 노하우를 살려 협력업체에도 도움을 주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삼성전기는 이달 초 협력업체 6곳에 생산성 컨설팅을 시작했다. 공장 자동화 등 제조 효율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정년퇴임한 ‘베테랑’이 활약하기도 한다. 현대중공업에서는 퇴직 기술자들이 협력사 8곳에 찾아가 제조 공정을 점검하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자문을 해주고 있다. 현대중공업 협력업체인 (주)대건의 장성만 대표는 “시간과 비용을 단축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 기술 지원을 희망하는 업체가 많다”고 말했다.

공급처 늘리고 핵심부품 직접 생산

삼성전자, LG전자 등은 유사시 협력사 공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스마트팩토리 전환을 지원하고 있다. 스마트공장 솔루션 기업인 LS일렉트릭 역시 청주공장 스마트공장 전문가들을 파견해 5월부터 협력사 20곳에 스마트공장 시설 확충을 지원한다. 지원 자금 25억원도 편성했다. 근로자 감염이라는 위기상황에서도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도록 공정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해주겠다는 계획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근 정부가 운영하는 정책금융 지원 프로그램(중소기업 자금 지원 프로그램)을 신청했지만 담보가 부족하거나 신용이 불량해 탈락한 기업들의 사례를 취합해 다시 건의했다. 상생펀드를 마련해 직접 대출도 해준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SK하이닉스 등 네 곳이 운용하는 코로나 상생펀드 기금만 4조원에 육박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 자금을 책임지는 ‘은행’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협력사 역량을 키우는 동시에 공급망을 다변화해 위험을 분산시키는 전략도 취하고 있다. 한화큐셀도 태양광 소재 공급망을 손보고 있다. 구매팀에서 추가 공급처를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급처가 특정 지역에 편중되지 않게 관리하고, 더 많은 협력업체와 계약하는 식이다.

한 자동차 부품업체 대표는 “과거 완성차업체는 특정 부품을 2~3개 협력사에서 받았지만 이젠 4~5개 회사와 거래하려 한다”며 “효율성보다는 리스크를 줄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최근 내부보고서를 통해 “보호무역주의 기조로 글로벌 분업체계의 약화가 예상된다”며 “기존 공급망의 보완 및 대체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핵심 부품을 직접 생산하겠다는 기업도 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공급망을 재편하면서 유압계통 등 핵심 부품을 자체 생산하기로 했다. 작년 일본의 수출규제에 이어 코로나19 사태까지 터지면서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회사 측은 “해외에 의존하던 유압계통 기술을 자체 개발했다”며 “구매팀과 개발팀이 협업해 특정 부품이 한 국가에 편중돼 공급되는지 살펴보고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수빈/송형석/도병욱 기자 cl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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