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 이전으로 EU 연 33兆 손실”
EU 행정부인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29일 “다른 국가에 본사를 두거나 조세 이전을 했다는 이유로 해당 기업을 구제금융 대상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다만 EU가 정한 ‘조세피난처 블랙리스트’(조세 비협조국)에 소재를 둔 기업을 대상으로 구제금융을 제공하지 않는 건 원칙적으로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EU가 지정한 조세피난처는 미국령 사모아·괌·버진아일랜드, 영국령 케이맨제도, 피지, 사모아, 오만, 트리니다드토바고, 바누아투, 팔라우, 파나마, 세이셸 등 12곳이다.
앞서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폴란드 등은 조세피난처에 소재를 둔 기업에는 구제금융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문제는 이번 논쟁의 대상이 단순히 EU의 블랙리스트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 비정부기구인 조세정의네트워크는 지난달 28일 영국 스위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유럽의 ‘조세피난처 4대 축’이라고 지적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최근 네덜란드를 향해 ‘조세 덤핑 국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올해 영국의 명목 법인세율은 19.0%다. 스위스는 21.1%, 룩셈부르크는 24.9% 네덜란드는 25.0%다.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는 OECD 평균(21.9%)에 비해 높다. 다만 세금 감면 등을 통해 기업들이 실제로 내는 법인세 실효세율은 훨씬 낮다.
법인세 실효세율만 따져보면 룩셈부르크가 0.7%로 가장 낮다. 이어 네덜란드(4.9%) 스위스(5.7%) 영국(10.5%) 순이다. 미국과 유럽 기업 등이 세금을 덜 내기 위해 법인세 실효세율이 낮은 이들 국가로 매출과 이익을 이전할 유인이 충분한 셈이다. 보고서는 이들 4개국 때문에 다른 EU 회원국이 연간 276억달러(약 33조6500억원) 상당의 법인세 손실을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 법인세 인하에 영향 미칠까
EU가 회원국인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에 법인세 실효세율을 인상하라고 요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분석이다. 북부와 남부 유럽 간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법인세 논쟁까지 벌어질 경우 EU 분열을 더욱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EU 회원국도 아니다.
관건은 영국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상당수의 조세피난처는 영국계다. 런던 금융가인 시티오브런던을 중심으로 영국령 케이맨제도, 맨섬, 저지섬 등이 촘촘한 네트워크로 형성돼 있다. EU는 브렉시트 직후인 지난 2월 케이맨제도를 조세피난처 블랙리스트에 포함하기도 했다.
지난 1월 31일 EU를 탈퇴한 영국은 연말까지 EU와 자유무역협정(FTA) 등 미래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영국 정부는 노동과 조세 등 각 분야에서 규제 완화를 준비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법인세 인하다. 영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던 2010년부터 법인세율을 28%에서 단계적으로 19%까지 낮췄다. 브렉시트 이후엔 기업 추가 유치를 위해 17%까지 인하하겠다는 당초 계획을 재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EU는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다. EU는 영국이 브렉시트 이후에도 세금 등 각 분야에서 EU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EU는 영국이 법인세 인하 등을 통해 조세피난처가 되면 미래 협정을 체결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이와 관련, 리시 수낙 영국 재무장관은 1일 “조세피난처에 있는 기업들을 구제금융에서 제외하는 건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보리스 존슨 총리도 이날 “EU가 세금 등 기존 규정을 따르라는 요구를 철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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