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전 세계는 5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유(WTI) 가격이 '마이너스' 37달러로 추락하는 초유의 상황을 경험했다. 수평시추법과 수압파쇄법의 발전은 미국을 원유 순수입국에서 세계 최대의 원유 수출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감산을 놓고 벌어진 전통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의 충돌이 올 들어 펼쳐진 유가 하락을 촉발했지만, 기저엔 2014년 1차 셰일붐의 붕괴 이후 약 5년 만에 찾아온 2019년 2차 셰일붐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 12일 OPEC+의 감산 합의에도 유가는 배럴당 20달러선을 뚫고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등 전통의 중동 산유국들의 생산원가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10달러선까지 내려갔다. 이는 현재의 초저유가가 그저 공급 측면의 이슈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1차적 원인으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전 세계적으로 셧다운(shut-down)이 잇따르며 화석 연료의 수요가 줄어든 것이 꼽힌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석유 수요 감소의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신재생에너지 발전과 전기차가 주도하는 탈화석연료화의 흐름에 쐐기를 박은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이처럼 거대한 '판'의 변동은 투자업계의 지각 변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2차 셰일붐에 올라탔던 사모펀드(PEF)들은 투자 업체들의 도산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편 저유가를 시장 장악을 위한 기회로 보고 '버티기'에 들어간 곳들도 눈에 띈다.
실물경제 위기가 벤처투자 등 모험자본에 대한 자금 경색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크지만 코로나 이후의 세상,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움직임은 어느 때 보다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수많은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이 디밸류에이션(가치 하락)과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선 상황이지만 전염병의 상시화, 언택트(비대면), 디지털 플랫폼 등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이끌 유망주들은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하며 본격적인 성장을 예고하고 있다.
◆2차 셰일붐도 도산으로 끝나나..."투자 시장 양극화 가능성"
초저유가는 생산 원가가 평균 40달러 중후반대에 달하는 북미 셰일 '업스트림'(채굴) 기업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생산된 셰일 원유를 1차 가공해 정제시설이나 수출 터미널로 운송하는 '미드스트림' 산업에 집중 투자한 사모 투자자에까지 미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수많은 사모펀드가 투자한 미드스트림 업체 여럿이 파산 위기에 처해 있다. 석유컨설팅업체 리스타드에너지는 배럴당 20달러 유가가 유지되면 미 석유 생산·탐사업체 533개가 내년 말까지 도산하고 10달러 유가에선 1100여개 업체가 파산할 것이라 내다봤다.
실제 화이팅페트롤리엄, 체서피크에너지 등 채굴 기업들이 이달 초 미국의 회생절차인 '챕터11'을 신청했다. 채굴 업체들이 망하지 않는 한 장기 운송 계약을 통해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미드스트림 투자의 매력이었지만, 10달러대 유가에 채굴 업체들이 무너지면서 전제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미국 뉴멕시코 퍼미안 지역의 셰일 유전에서 생산된 원유를 이송하는 파이프라인을 운용하는 솔트크리크 미드스트림은 최근 금융 및 법률 자문사를 선정하고 파산 등 대비에 들어갔다. 이 업체는 미국의 유명 대체투자 전문 운용사 아레스(ARES) 매니지먼트의 주도로 국내 증권사와 공제회 등이 투자에 참여해 잘 알려진 업체다.
2018년 모건스탠리 주도로 SK㈜와 국민연금이 투자에 참여했던 브라조스 미드스트림 역시 장기채권의 신용등급이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내포한 최저 등급인 CCC+로 떨어지는 등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다수의 미드스트림 운용사들은 현재 부채 관리를 위한 전문 자문사를 선정하는 등 대비에 들어간 상태다.
한편 이 같은 상황을 기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글로벌 사모펀드인 블랙스톤은 지난 17일 북미 미드스트림 업체 톨그래스에너지의 지분 44%를 주당 22.45달러, 총 금액 63억 달러에 인수하는 계약을 마무리했다. 국내선 국민연금이 주요 공동투자자로 참여해 주목 받아온 거래다. 이 거래는 유가 하락의 여파로 톨그래스에너지의 주가가 계약 가격보다 40% 넘게 빠지면서 한 때 무산까지 거론됐다. 하지만 블랙스톤은 가격 변동 없이 거래를 마쳤고, 3월 중순 12달러대까지 떨어졌던 주가는 22달러선을 회복했다. 로버트W.베어드의 에단 벨라미 선임 애널리스트는 "블랙스톤은 추가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지금의 국면을 사업 확장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드스트림 투자 경험을 갖고 있는 한 대체투자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1차 셰일붐의 붕괴 이후 미드스트림 분야 시설 투자가 대거 중단되면서 벌어진 수급 불균형이 2차 셰일붐을 타고 사모펀드들의 미드스트림 투자붐으로 이어졌다"며 "그리고 이들이 투자한 자산은 대체로 그간 투자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중소형 업체에 집중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2차 셰일붐 붕괴의 여파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버티기'가 가능한 대형사가 아닌 중소형사부터 현실화될 것"이라며 "투자자들의 지형 또한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트 코로나'에 몰려드는 투자자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대응책으로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인도 등 거대 경제권 국가들이 자택대피령과 공장 가동 중단 등 강도 높은 '셧다운' 조치를 내리며 2분기 이후 경기 침체 우려가 커져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벤처투자는 그 여파에서 살짝 비껴가는 모양새다.
에어비앤비와 위워크 등 공유 경제 플랫폼 기업이나 온라인 여행사 익스피디아, 인도의 호텔 체인 오요 등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고 휘청이는 유니콘 기업들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눈은 이미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가 있다. 코로나19 여파가 실물 경기 침체로 이어지고, 이것이 경제 위기로 이어질 수 있지만 언택트로 설명되는 전염병 시대 사람들의 생활·근무 방식 변화는 우량 자산을 저가 매수하는 것 이상의 기회라는 판단이다.
최근 눈에 띄게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영역은 금융에 첨단 기술을 입히는 핀테크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셧다운이 모바일 결제나 온라인 쇼핑 등 그간 젊은 세대만의 전유물이었던 고객의 지평을 모든 연령층으로 넓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비싼 유니콘으로 꼽히는 전자결제 스타트업 스트라이프(Stripe)는 지난 16일 세콰이어, 안드레센 호로비츠, 제네럴 캐털리스트 등 대형 벤처캐피탈(VC)들로부터 6억달러의 자금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코로나19 여파로 미국 증시가 폭락하고 위워크, 에어비앤비 등 유니콘들의 기업가치 하락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스트라이프의 기업가치는 360억 달러로 지난해 투자 라운드 당시 인정됐던 기업가치(350억달러) 수준을 유지했다.
국가간 송금 및 환전 수수료를 최소화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주의 핀테크 스타트업 에어월렉스(Airwallex) 역시 DST글로벌, 텐센트, 세콰이어캐피탈 차이나, 힐하우스캐피탈 등 러시아 및 중국 투자자들로부터 1억6000만 달러의 시리즈D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미국 증시에서 수수료 없는 주식거래 서비스를 선보이며 돌풍을 일으킨 로빈후드(Robinhood) 역시 최근 시스템 과부하로 주식거래 앱이 먹통이 되는 사태에도 불구하고 기업 가치의 변동 없이 2억5000만 달러의 투자 유치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온라인 교육 등 에듀테크(EduTech) 스타트업들도 각광 받고 있다. 학교와 오프라인 학원이 문을 닫으면서 그간 온라인 교육에 소극적이었던 학생들과 교사, 교육기관들까지 새로운 교육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인도의 실시간 온라인 강의 플랫폼 베단투(Vedantu)는 GGV캐피탈, 레전드캐피탈, KB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4000만달러의 시리즈C 투자를 유치했다. 연초 10만명 수준이었던 베단투의 회원 수는 코로나19가 본격화된 3월 이후 한 달만에 두 배 가량 늘었다. 전 세계 대학들과 기업들이 원격 화상회의 플랫폼을 통해 강의 및 회의에 나서면서 주가가 폭등한 줌(Zoom)을 필두로 한 원격 화상회의 플랫폼이나 원격 진료, 원격 사업장 관리 스타트업에도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눈 앞의 코로나19 해결을 넘어 전염병의 대유행이 반복되는 상시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바이오 및 헬스케어 산업에 대한 투자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바이킹 글로벌 인베스터즈, 베인캐피탈 라이프사이언시스와 지프 캐피탈 파트너스 등은 최근 다양한 감염성 질병에 대한 면역 예방 체계 및 백신을 개발하는 어피니박스(Affinivax)의 1억2000만 달러 규모 시리즈B 투자에 참여했다. TPG캐피탈은 전국적인 의사 및 간호사 네트워크를 구축한 뒤 직접 또는 원격 진료를 통해 환자를 관리하는 헬스케어 스타트업 라이프스탠스헬스파트너스(LifeStance Health Partners)에 투자하기도 했다.
이 같은 흐름은 펀딩(자금 조달)시장에서도 눈에 띈다. 코로나19 여파로 2분기 이후 경기 침체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글로벌 연기금이나 공제회 등 기관투자가들 역시 보수적 관점에서 출자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 성장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여겨지는 산업군에 투자하는 펀드의 조성만큼은 무리 없이 이뤄지는 상황이다.
피치북에 따르면 벤록은 최근 헬스케어 분야에 투자하는 4억4700만달러 규모 펀드 조성에 성공했다. 안드레센 호로비츠는 4억5000만달러 규모의 암호화폐 투자 펀드를, 라이트스피드 벤처 파트너스는 각각 초기, 스케일업, 글로벌 스타트업 등에 투자하는 총 42억달러 규모의 3개 벤처펀드 조성을 마무리했다.
한 국내 대형 벤처캐피탈 대표는 "핀테크, 헬스케어, 하이테크 등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이끌어 갈 어떤 것도 완전히 새로운 분야는 아니다"라며 "중요한 것은 전염병이 이들을 필요로 하는 미래를 앞당겼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19가 촉발한 전 세계적 산업 구조조정 속에서 투자자들은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1등 기업을 찾고 있다"며 "지금 투자 받고 있는 기업들 속에 5년, 10년 뒤 미래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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