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안전 불감, 불법 개조, 감독 소홀 등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제천·밀양 화재 때도 그랬다. 근본 개선과 예방보다는 늑장 대처, 땜질 처방, 대증요법이 여전한 우리의 민낯이다. 그 이유가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의 지적처럼 주도적으로 역사를 전개해본 적이 없어 항상 사태가 발생해야 그때부터 대처하기 때문일까.
역사적으로 재난 전쟁 등에 철저히 대비하고 예방했던 적이 없다. 닥치고 나서야 부산을 떨었다. 이런 나라에서 코로나에 상대적으로 잘 대처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럴 만한 배경이 있다. K방역은 경험과 제도 개선이 쌓인 ‘축적의 산물’이어서다. 과거 정부들이 건강보험을 도입하고, 전 국민에 확대하고, 전염병 사태를 겪으며 시스템을 정비했고, 국민도 경험을 축적한 게 이제 빛을 발한 것이다.
반복되는 화재사고는 아무런 축적 없이 매번 땜질만 한 대가다. 이 문제는 국중호 일본 요코하마시립대 교수의 《흐름의 한국, 축적의 일본》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은 ‘넓고 얇게’, 일본은 ‘좁고 깊게’식이고, 한국이 확 바꾸는 디지털이라면 일본은 조금씩 고치는 아날로그적 사고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일본은 아직도 인감도장을 쓰듯이 한 정당이 수십 년 집권하는 반면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쁜 것도 고치고 좋은 것도 고친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은 온전히 축적의 산물이다. 이승만 정부가 국가 틀을 잡고, 박정희 정부가 산업을 세우고, 전두환 정부가 정보기술(IT) 인프라를 구축하고, 노태우 정부가 사회간접자본(SOC)을 건설하고, 김대중 정부가 벤처를 키우고, 노무현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열고, 이명박 정부가 금융위기를 넘기고, 박근혜 정부가 재정건전성을 지켰다. 선진국들이 우왕좌왕하는데 방역도 경제도 이만큼 버티는 것은 그간 쌓아올린 주춧돌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당과 청와대에서 ‘주류 교체’ ‘패권 교체’를 언급하고 개헌론까지 제기해 미묘한 기류를 낳고 있다. 총선 압승의 여세를 몰아 ‘적폐청산 시즌2’처럼 갈아엎겠다는 신호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지금이 그럴 때인가. 겸손 모드가 벌써 사라진 것인가. 총선을 기존 정책에 대한 포괄 인증이거나, 미래 지향에 대한 국민적 합의로 삼는 것은 견강부회일 수 있다.
코로나 이후 모든 게 달라질 세상에서 국가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중요해졌다. 정부·여당이 유연하고 스마트해져야 하는 이유다. 관성적인 규제 본능, 축적과 시장원리를 외면한 그간의 정책으로는 대전환에 대처할 수 없다.
여당 원내대표 경선에 나선 김태년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진화하지 않으면 도태한다”고 했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당은 어떤 진화를 보여줄 것인가. 역대 정권마다 1%포인트씩 떨어진 잠재성장률을 어떻게 반전시킬 것인가. 저출산·고령화 속에 연금개혁은 언제까지 미룰 것인가. 중국에 따라잡힌 주력산업과 신산업 활성화에 어떤 복안이 있나. 무엇보다 산업화·민주화 이후에 어떤 지향을 갖고 있는가. 여기에 답해야 한다.
한국이 도약하지 못하는 이유로, 대통령 경제과학특보인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개념설계 역량’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세계 최고층 빌딩을 짓는 기술이 있지만 설계는 남의 것에 의존했다. 흔히 K방역으로 ‘선진국 콤플렉스’를 떨쳐냈다고 반색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질적 점프가 없다면 사상누각이다.
참고 인내한 국민이 바라는 것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가 아니라 ‘품격있고 안전하고 자유롭고 공정한 나라’이지 않을까. 모처럼 찾아온 ‘존경받는 나라’가 될 호기를 꽉 잡으려면 지나온 세월의 축적을 존중하고 이를 발판 삼아 미래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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