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지는 이해가 가지만 업계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주문이라고 생각합니다”(한 벤처캐피탈 대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지난 23일 국민연금, 군인공제회, 신한은행, KB증권 등 국내 주요 벤처펀드 출자자(LP)들과의 간담회에서 했던 발언이 벤처투자업계의 뒷말을 낳고 있다.
박 장관은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안효준 국민연금 기금운용 본부장(CIO)에 “국민연금의 스타트업 투자 현황 공개를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스타트업 기업이 국민연금이나 싱가포르 투자청(GIC) 같은 글로벌 연기금의 투자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시장의 신뢰가 높아질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이에 안 본부장은 “가능한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이어 그는 “올해도 확정된 출자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계 없이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간담회는 마무리됐지만 이날 박 장관의 발언은 기관투자자들과 벤처투자업계에서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다. 대체로 “황당하다”는 반응이 많다. 국민연금 등 글로벌 연기금 투자자의 투자 소식이 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운용사 간 경쟁이 치열한 벤처펀드 시장에서 국민연금도 복수의 출자자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국민연금이 출자한 펀드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공개하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란 지적이다.
현재 국민연금은 국내 벤처펀드에 연간 1000억~2000억원 가량을 출자하고 있다. 안 본부장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현재 약정기준 9100억원을 32개 위탁운용사를 통해 52개 벤처펀드에 투자했다. 국민연금의 벤처투자는 철저히 ‘블라인드 펀드’ 출자를 통해 이뤄진다. 블라인드 펀드는 투자 대상을 미리 정해놓지 않은 상황에서 복수의 기관투자자가 모여 하나의 펀드를 만들고, 이를 위탁 운용하는 벤처캐피탈 등 GP(운용사)가 펀드 목적에 맞게 투자하는 펀드를 말한다. 블라인드 펀드의 투자 대상은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는 것이 통상의 원칙이다. 투자 기업이나 운용사 등이 직접 홍보하고자 하는 수요(니즈)가 있을 때에도 대체로 LP들과의 협의를 통해 부분적으로 공개가 이뤄진다.
대체로 한 펀드에 수백억 가량을 출자하는 국민연금은 여러 출자자 중에서도 입김이 센 축에 속한다. 하지만 투자 포트폴리오의 공개는 함께 펀드를 조성한 LP와 GP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게다가 대부분 운용사들은 운용 펀드의 투자 현황이 외부에 자세히 공개되는 것을 극히 꺼린다. 한 대형 벤처캐피탈 관계자는 “높은 수익률만큼 리스크가 큰 벤처투자는 10곳에 투자해서 1개의 대박을 노리는 분야”라며 “포트폴리오가 전부 공개될 경우 성공 이전에 어려움을 겪는 투자 기업에 대한 잡음 때문에 펀드의 정상적인 운용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투자 포트폴리오 속에는 해당 운용사의 전략과 네트워크가 녹아들어있다”며 “이런 것을 공개하고 싶어 하는 운용사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박 장관의 요청을 포트폴리오 공개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현재 중기부가 추진 중인 ‘K유니콘 프로젝트’에 국민연금 등 기관 출자자들이 동참해줄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기부가 최근 내놓은 ‘K유니콘 프로젝트’는 2021년까지 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인 유니콘을 현재 11개에서 20개 이상으로 늘리고, 2022년까지 기업가치가 1000억원이 넘는 예비 유니콘 기업을 500개로 늘리는 것이 골자다.
한 공제회 관계자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늘면서 민간 출자자들의 벤처투자 투자심리가 약화되자 이를 촉진시키겠다는 차원에서 나온 이야기로 이해하고 있다”면서도 “정부가 지나치게 유니콘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유니콘을 육성한다는 취지로 정책 자금을 투입하고, 이를 빌미로 벤처펀드를 관제화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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