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돌아왔다. 하노이의 도로는 요란한 경적 소리로 분주하고, 새벽녘 거리는 체조며 사교댄스로 부지런을 떠는 이들로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난다. 학교 교정도 오랜만에 아이들의 웃음으로 가득하다. 5월4일 초등학교 6학년 이상 학생들이 등교를 시작한데 이어 11일부터 유치원을 포함한 모든 학교가 휴교를 풀기로 했다. 응우옌 쑤언 푹 총리는 최근 정부상임회의에서 “베트남은 코로나19를 근본적으로 격퇴했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강력한 사회적 격리를 시행한 지 불과 한 달 여 만의 성과다.
위기는 사람이든, 조직이든 생얼굴을 드러나게 해주는 법이다. 코로나19는 베트남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압축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코로나19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베트남 정부와 인민은 그들이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지를 보여줬다. 정부는 공산당 1당 체제 유지라는 정치적 안정이 경제 발전의 당위에 우선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중국의 시진핑 체제가 초기 방역에 실패하면서 리더십의 위기를 맞는 모습을 베트남 공산당은 반면교사로 삼았다. 베트남 보건 당국은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언로(言路)를 열어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했다. 관영 매체들은 물론이고,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통한 정보 유통을 개의치 않았다.
코로나19는 베트남 정치체제의 의사결정 구조가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 지와 관련해서도 몇 가지 예측의 근거를 제공해줬다. 전국적인 봉쇄에 가까운 사회적 격리를 결정하면서 베트남은 사회적 합의를 제1의 원칙으로 삼았다. 총리 등 중앙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지방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총리는 큰 틀의 영(令)만 발표하고, 직할시와 각 성(省)들의 의견을 수렴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최종 결정을 내렸다. 격리를 풀 것인지 여부를 놓고, 미디어를 동원해 여론조사까지 실행했다.
중앙과 지방의 권력 균형은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로 진입하기 위해 베트남이 택한 전략 중 하나다. 발전소 등 핵심 인프라나 대규모 토지 사용에 관한 인허가권은 총리에게 남겨두되, 그 외의 프로젝트는 각 성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 이는 베트남이 외국인투자의 수혜주가 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0명의 공산당 중앙위원들이 중앙과 지방을 순환하며, 남북으로 1600킬로미터에 달하는 베트남 전역을 집단 통치한다는 게 베트남 정치 구조의 핵심이다.
이 같은 원칙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2016년 출범한 현 베트남 지도부부터다. 현 공산당 최상위 리더들은 중국식 중앙집권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왔다. 주석과 당서기를 응우옌 푸 쫑 당서기가 2018년 10월부터 국가 주석을 겸한 게 신호탄이었다. 집단 지도체제는 점진적 변화와 안정에는 적합했으나, 비효율과 부패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모두의 합의는 곧 누구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과 상통했다. 연줄과 인맥이 의사결정 과정의 요체가 되면서 정치, 사회 각 영역에서 정실 자본주의가 기생충처럼 퍼졌다. 2045년 고소득 국가 진입이라는 절체절명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효율과 부패 척결이 선결돼야했다. ‘시진핑의 중국’은 베트남 리더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베트남은 2016년 이전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내년 구성될 새로운 베트남 지도부는 당장의 경제적 성과보다는 정치적 안정과 점진적인 경제 성장에 무게를 둘 것이란 얘기다.
코로나19라는 국가적 위기를 토양 삼아 베트남 애국주의가 꽃을 틔웠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잉미 사건’이 대표적이다. 대구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될 무렵, 베트남 정부는 다낭에 입국한 한국인 관광객들을 예고 없이 시설에 격리시켰다. 처우를 묻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 관광객이 바잉미를 가리켜 “빵 쪼가리 몇 개”라고 표현하면서 베트남 네티즌들의 반발을 샀다. 베트남 정부가 한국과의 관계 손상을 막기 위해 금기에 가까울 정도로 금해왔던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 얘기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베트남은 1975년 전쟁 종식 이후에도 북과 남의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어왔다. 무력을 통한 통일은 민초들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역사적으로도 베트남은 단일 민족공동체라는 의식이 약한 편이었다. 남북으로 1600km에 달하는 특이한 모양의 영토는 크메르, 참파 등 다양한이(異)민족 왕조들에 대한 정복 위에 세워졌다. 베트남 정부가 지난 2011년 하노이 천도 1000년을 기념하면서, 대대적으로 ‘다이비엣(大越)’이란 옛 왕조의 국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은 베트남의 통일성이 역사적으로 결여돼 있었다는 방증이다. 시장 경제로 전환된 이후 베트남 애국주의는 2014년 반중 시위에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나타난 베트남 애국주의는 자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반중 시위 때와 다르고, 향후 폭발력도 훨씬 커질 가능성이 높다. 베트남의 대중 매체들도 ‘베트남적인 것’을 강조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Kenh14는 ‘We Choice Awards’라는 시상식을 매년 열어 네티즌들이 뽑은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는데 시상대에 오른 인물들은 베트남적인 것을 잘 구현한 연예인, 예술가, 스포츠맨들이 대부분이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 감독도 2018년에 선정된 바 있다.
베트남 애국주의를 가장 빠르게 흡수하고 있는 층은 젊은 세대들이다. 그 중에서도 2000년대 이후에 출생한 밀레니엄 세대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선 이들을 링링후(零零後, 2000~2009년에 태어난 집단)라고 부른다. 작년 기준으로 베트남의 15~19세 인구는 남녀 각각 7.2%, 6.2%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베트남의 초혼 연령이 20대 중반(2017년 25.3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부모는 30, 40대 중반 세대들이다. 베트남의 ‘밀레니엄 키즈’들은 베트남 경제 성장의 과실을 고스란히 누리고 있는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선진국의 동년배들 못지 않게 인터넷과 모바일 세상의 혜택을 흠뻑 받고 있다. 그들의 부모들은 비록 전쟁을 겪지는 않았으나, 전후의 고단한 삶을 유년 시절 체험해야했다. 대형 로펌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40대 초반의 한 변호사는 “아버지가 교사였지만 집에 돈이 너무 없어 형과 함께 농번기 농촌들 돌며 아이스크림을 팔았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시장경제로의 전환 효과를 누리기 시작하면서 베트남은 10년 주기로 기존 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젊은 세대들의 등장을 맞이했다. 1990년대엔 이들을 ‘song voi(fast living)’라는 말로 표현했다. 밤이면 일군의 청년들이 스쿠터와 오토바이크를 몰고 거리를 질주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그들은 때로 공공장소에서 여자 친구와 입을 맞추고, 포옹하는 등 금기를 깼다. 당시를 기록한 뉴욕 타임즈는 이렇게 적었다. “20살 무렵의 일군의 남성들이 자신의 오토바이크 안장에 여자 친구를 태운 채 거리를 질주한다. 그들은 과시하듯 위스키를 마시며 으스대는데 마치 제임스 딘처럼 행동한다” 2000년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머라이어 캐리의 음악을 듣고, 영화 타이타닉에 매료됐으며, 너도나도 영어 학원에 등록해 미국 유학을 꿈꿨다. 확실히 그들은 이전 세대와는 달랐다.
하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영 제너레이션(young generation)’들은 애국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억눌렸던 부모들의 삶에 반항하듯 자유를 만끽했을 뿐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젊음을 누렸고, 현재 기성 세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자녀들을 해외로 유학 보내고, 돈을 벌면 해외에 얼마간 부를 축적해야 하며, 절대로 애국심으로 빈패스트 자동차를 사는 일은 없는 세대다. 유럽 여행을 쉽게 가기 위해 포르투칼 국적을 취득하는 이들도 꽤 많다. 포르투칼은 유럽연합(EU) 국가 중 얼마간의 투자금만 내면 국적을 쉽게 내주는 나라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젊은 세대들에 전략적인 중요성을 부여해왔다. 그 위에 어떤 것이든 그릴 수 있는 백지(白紙)와도 같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10대들로 구성된 홍군을 전면에 내세워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중화주의에 물든 중국의 링링후들은 중국 공산당이 미국과의 전면전에서 가장 강력한 우군으로 삼는 이들이다. 베트남 공산당이 밀레니엄 세대들의 애국주의를 어떻게 활용할런 지는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 베트남이 중국처럼 배타적인 애국주의를 강조할 가능성도 낮다. 다만, 코로나19 이후 베트남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로 애국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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