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불빛 아래 걸려 있는 큰 고기 덩어리, 용도와 중량을 이야기하면 그에 맞춰 썰어주는 가게 주인. 동네마다 여러 개씩 있던 작은 정육점들의 풍경이다. 이후 등장한 프랜차이즈 정육점들은 대형 냉장 설비에 소포장한 고기를 진열해 팔았다.
이 같은 1세대 동네 정육점과 2세대 프랜차이즈 정육점은 2000년대 대형마트에 밀려 한때 거의 사라졌다. 최근 ‘작은 정육점’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인기 있는 온라인 정육점이 오프라인에 역진출하고, 자판기로 24시간 판매하는 무인 정육점도 등장했다. 기술을 접목해 숙성육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곳도 있다. 3세대 정육점은 프리미엄 품질, 가격 경쟁력, 육가공 전문 기술을 내세워 승부하고 있다.
자판기로 초신선 고기 판매
미트박스는 국내 최초의 축산물 기업 간 직거래(B2B) 플랫폼이다. 2014년 창업해 현재 월평균 10만 명이 이용한다. 거래액은 월 200억원에 달한다.
미트박스를 운영하는 글로벌네트웍스는 지난해 말 경기 성남시에 고기 자판기 ‘프레시스토어(전 미트박스365)’ 매장을 냈다. 현재는 사내 스타트업이었던 '스마트키오스크'가 분사해 '프레시스토어'라는 이름으로 고기 자판기 시스템을 운영한다. 진열 상품을 스마트 터치 화면에 선택하고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바로 포장된 고기가 나오는 구조다.
최적의 온도와 습도 설비를 갖춘 이 자판기에는 클라우드 관제 시스템이 적용돼 재고 현황을 알 수 있다. 원격으로 온도를 제어하거나 판매 가격도 변경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비대면 소비가 늘면서 무인 정육점 가맹 문의가 크게 늘었다.
서영직 미트박스 대표는 “내달 서울 5곳, 대구 1곳 등에 추가 출점할 계획”이라며 “코로나19 확산으로 방문자가 이전보다 30%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프리미엄 정육점 증가
육가공 기술로 승부하는 부티크 정육점(소규모로 운영하는 소비자 맞춤형 고급 정육점)도 늘고 있다. ‘에이징’이라 불리는 숙성 과정을 통해 고기의 풍미를 한층 더 끌어올려 프리미엄 시장으로 진입한 것. 일반 고기에 비해 30~40% 비싼 숙성육을 백화점이나 대형 유통 채널보다 싸게, 취향대로 맞춰 숙성해 주는 곳들이다.
서울 서초동에는 감성고기, 에이징룸, 숙성공방 등이 경쟁하고 있다. 감성고기는 정육점 지하 숙성고에서 마블링이 적은 3등급 육우를 4~6주간 숙성해 풍미를 극대화한다. 에이징룸은 셰프와 정육사가 함께 창업해 매일 좋은 고기를 골라 숙성하고, 소비자에겐 최적의 요리법까지 제공한다.
숙성공방은 친환경 저지방 국내산 육우를 4주 이상 숙성해 판매, 동네에서 소문난 부티크 정육점이 됐다. 이외에도 에이지너리14, 다루다 등이 문을 열었다. 부티크 정육점은 취향에 따라 숙성의 정도와 부위별 가공법을 다르게 할 수 있다. 에이징룸 관계자는 “숙성육은 40~50일 기다렸다가 먹는 기다림의 미식”이라며 “한 번 그 맛을 본 소비자들의 재방문율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샤퀴테리’(charcuterie: 유럽식 육가공품을 지칭하는 프랑스어)도 육류 소비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고기와 부산물 등을 가공해 흔히 먹는 소시지부터 프로슈토, 하몽, 잠봉, 파테, 초리조, 살라미 등이 인기다. 별다른 조리가 필요 없고 다채로운 풍미를 느낄 수 있어 20~30대에 인기다. 소금집, 메종조, 세스크멘슬, 써스데이스터핑, 존쿡델리미트숍, 그릭슈바인 등이 잘 알려진 식당이다. 프리미엄 베이컨을 판매하는 사실주의베이컨은 이태원에 이어 여의도에도 문을 연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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