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실용주의자라서 사상 따위에 영향받지 않는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대개 어느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다. 하늘의 계시를 듣는다는 미치광이 권력자들도 몇 년 전에 어느 학자가 끄적거려 놓은 글에서 자신의 망상을 뽑아낸다.”
201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부부 경제학자 아비지트 배너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과 교수와 에스테르 뒤플로 MIT 경제학과 교수가 펴낸 신간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에서 인용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명언이다. 경제학을 참칭하며 현실을 무시한 메시지를 남발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케인스의 말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 지상에 두 발을 딛지 않은 채 허황된 언어만 구사한다면 ‘나쁜 경제학’이다. 반대로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고 실증(實證)하는 게 ‘좋은 경제학’이다. 저자들은 개발도상국 빈민가 곳곳을 누비며 빈곤 퇴치를 위한 연구를 지속해 오면서 기존 이론과 고정관념이 맞지 않는 순간을 마주하고 ‘좋은 경제학’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고 소개한다.
이 책에선 이민자, 무역 개방, 기본소득 등 세계적으로 민감한 쟁점에 대해 폭넓게 다룬다. 저자들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반(反)이민정책을 강력히 비판한다. 우선 1974년 아서 래퍼가 워싱턴DC의 한 식당에서 당시 백악관 수석이었던 도널드 럼즈펠드(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국방장관), 럼즈펠드 밑에 있던 딕 체니(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부통령)와 함께 식사하며 세율과 정부 수입에 관한 주장을 펼치다 냅킨에 ‘래퍼 곡선’을 그린 일화를 전한다. 이와 더불어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 이민자에 대해 “거지 소굴 같은 나라들에서 온 이민자들이 미국인의 일자리를 뺏고 있다”고 발언해 비난을 받았던 걸 함께 덧붙인다. 저자들은 이 둘을 ‘나쁜 경제학’의 대표적인 예라고 주장한다. 실증 없이 함부로 단정했기 때문이다.
빈곤층을 위한 기본소득과 관련해선 “개발도상국엔 적용될 수 있지만 선진국은 도입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비단 돈을 벌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함이란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저자들은 “선진국의 경우 ‘연간 1만3000달러의 보편기본소득이 조건 없이 주어지면 일 또는 구직을 그만두겠느냐’는 설문조사 응답자 중 87%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돈이 필요해서만이 아니라 일이 목적의식, 소속감, 존엄성을 느끼게 해 주는 원천”이라고 설명한다.
기존 경제학에서 전제로 삼는 ‘인간의 합리적 선택’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엔 인도 북동부 비하르주와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소득 하위 30%에 해당하는 약 1억 명의 극빈층이 돈을 더 벌 수 있는 수도 델리 근처로 이사가지 않는 현상이 나온다. ‘합리적 인간’이라면 당연히 짐을 싸서 이주하겠지만 떠나는 이는 소수였다. 저자들은 “부모가 있고,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가 있으며,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 손 내밀어 줄 이웃이 있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며 “이런 이유는 경제학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좋은 경제학’이 현장에 제대로 접목되기 위해선 존엄과 사회적 지위를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의 본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최고경영자와 일류 운동선수들은 이기고자 하는,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이루기 위해 일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이 범죄자나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는 경우 복지정책의 혜택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낸다. 법인세를 인하해야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다는 주장과 사실에 대해선 “근거가 부족한 얘기”라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어떻게 실증했는지는 나타내지 않는다. “세율을 일정한 범위에서 올리면 세금을 더 거둘 수 있지만, 너무 올리면 세수가 오히려 줄어든다”는 중요한 사실을 이론적으로 언급한 래퍼 곡선에 대해서도 “식당 냅킨에 즉흥적으로 그려졌다”는 것 외엔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다.
이 같은 비판을 예상했을까. 저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불완전하다고 인정한다. “경제학자들이 빠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고 실토한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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