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할아버지 역할

입력 2020-05-14 17:52   수정 2020-05-1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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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이후 줄곧 아버님,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아내에게 시집살이를 하게 한 셈이라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지만, 내 딸과 아들에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성장할 좋은 기회를 준 셈이라고 자부한다.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했다. 처가 직장에서 돌아오면 집안에서는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여러 가지 일을 하기 바빴다. 자연스럽게 아이들 군기반장 역할은 내가 했다. 딸이 다섯 살쯤 됐을 무렵, 내가 딸의 잘못을 야단치려 하자 딸이 할아버지에게 내가 야단쳤다고 이르겠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상관없이 야단을 쳤다. 그 후 아버님이 내게 그 일로 지적하신 일은 없었다.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아버님이 내 딸에게 “잘못했으니 야단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아빠 말을 잘 들으라”고 말씀하셨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내게 약간의 견제 효과는 있었다. 아이들이 이른다고 해도 아버님이 아이들에게 동조하시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부모로서 정당한 이유가 있어 야단을 쳤다는 생각이 들어야 아버님도 마음이 편하실 터였다. 나로서는 아이들과 아버님 중간자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야단을 쳤다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나도 할아버지가 됐다. 세상이 바뀌어 내게 손주들과 함께 살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직장 다니는 내 딸이 근래 약 두 달 동안 매주 금요일마다 우리 부부에게 여섯 살, 네 살 된 두 손녀를 맡겼다. 덕분에 나도 금요일 오후에는 일찍 퇴근해 손녀들과 함께 지낼 기회가 생겼다.

내 처는 아이들과 함께 핫케이크 만들기, 인형 목욕시키기 같은 놀이를 했다. 나 역시 조수 노릇을 하며 할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익힐 좋은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그러면서 손녀들이 내 딸이 어렸을 때 아버님께 하던 작전을 구사하는 것을 발견했다. 한 번은 손녀들이 나를 보고 집 앞 놀이터에 나가자고 한 후, 엄마가 잘 사주지 않는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했다. 우리 아이들도 어렸을 적에 아이스크림을 잘 사주지 않으면 종종 할아버지에게 졸라서 아이스크림을 먹은 일이 있었다. 예전 일이 생각나 즐겨 손녀들의 요청에 응해줬다.

아차. 그런데 딸에게는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나도 아버님처럼 부모의 뜻도 헤아리며 아이들의 욕구도 잘 채워주는 할아버지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일까? 할아버지가 돼서도 여전히 필요한 것은 가족 사이의 관계를 다면적으로 고려하는, 바로 끊임없는 중간자적인 역할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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