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의 쌀’ 반도체를 자급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의 최첨단 공장을 미국에 유치한 것이다. 세계 최대 통신장비업체인 중국 화웨이를 견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웨이를 고객으로 둔 TSMC까지 압박해 이뤄낸 성과다. 뉴욕타임스는 “TSMC의 공장 유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승리”라고 보도했다.
반도체, 의약품 공급망을 미국으로
미국 제조업 부흥은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선거공약이었다. 2017년 취임 이후 철강·알루미늄, 세탁기 등에 관세를 때려 해외 기업의 미국 내 공장 설립을 유도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아시아 부품 공급망에 혼란이 발생해 미국 기업들이 피해를 보자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에 집중된 공급망을 미국 또는 동맹국으로 옮기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백악관은 중국에 생산기지를 둔 미국 기업이 미국 또는 동맹국으로 이전할 경우 그 비용만큼 세금을 공제해주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특히 의약품과 반도체, 군사장비 등 국가안보와 관련된 공급망은 모두 미국으로 가져오겠다는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는 미래 사회의 핵심 기술이다. 인공지능(AI)과 로봇, 5세대(5G) 통신 등도 모두 반도체를 통해 구현된다. 미 국방부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대만과 중국, 한국은 미국의 디지털 경제의 삼각 의존 축”이라며 “미국이 이런 상황을 풀어내기 위해 산업정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존 뉴퍼 미 반도체산업협회 회장은 “반도체는 미국의 경제력과 국가안보의 근간이기 때문에 국내 반도체 생산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며 “중국과 다른 나라들은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기업들은 1970년대만 해도 독보적 반도체 기술을 보유했다. 하지만 이후 대부분 아시아에 제조를 맡기고 설계에만 집중해왔다. 제조도 함께해온 인텔은 몇 년 전 10나노(㎚) 미세공정부터 삼성전자와 TSMC에 뒤처지고 있다. 메모리 업체인 마이크론, 파운드리 회사인 글로벌파운드리도 마찬가지다. 글로벌파운드리는 2018년 10나노 이하 기술 개발을 포기한 상태다. 이번 TSMC 유치는 미국의 반도체산업에 획기적 발판이 될 전망이다.
트럼프의 중국 견제에 휘말린 TSMC
TSMC의 미국 투자는 트럼프의 압박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미 정부는 작년 5월 국가안보를 이유로 화웨이 등 일부 중국 기업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퀄컴 등 미국 기업들이 이들 블랙리스트 기업에 수출하려면 상무부 승인을 받도록 했다. 수출길 일부는 터놓았지만, 미국 기업들은 승인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상무부는 이 제재를 확대해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이 미국산 장비로 생산한 반도체를 화웨이 등에 수출할 때 승인을 받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하기로 했다. 이는 코로나19 사태로 악화된 미·중관계, 양국 간 기술패권 싸움과 무관하지 않다.
새 규정이 시행되면 타격을 받는 회사는 TSMC다. TSMC는 매출 가운데 애플 등 미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60%로 가장 높지만 화웨이 등 중국 기업 비중도 20%가량 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TSMC는 미국의 승인을 거치도록 한 규제가 시행되지 않도록 로비를 벌여왔다”며 “이번 투자는 TSMC의 로비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TSMC가 생산비가 높은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코로나19 이후 세계화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란 분석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발병은 세계화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이번 투자가 내년에 시작된다는 점에서 실제 투자 여부는 오는 11월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에 달렸다는 관측도 있다. 대만 폭스콘은 2017년 미 위스콘신주에 100억달러를 들여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공장을 짓기로 했지만 투자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TSMC가 미국에 짓기로 한 공장은 웨이퍼 2만 장 규모로 대만 내 최첨단 공장의 5분의 1 수준이다. 투자비는 2021~2029년까지 9년간 120억달러다. 최첨단 공정이란 점을 감안하면 많지 않은 액수다. 5㎚ 공정은 현재로선 최첨단이지만, 공장이 가동될 2024년엔 첨단이 아닐 수 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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