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글로벌 팬데믹(대유행)으로 치달으면서 국내 기업들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세계 곳곳의 생산기지가 셧다운(일시 가동 중단)과 가동을 되풀이하는 상황이 두 달 가까이 이어졌다. 소비시장도 꽁꽁 얼어붙었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오프라인 매장이 문을 닫았다. 주요 기업이 최근 열린 1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2분기는 실적 예측 자체가 불가능한 ‘시계 제로(0)’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 이유다.
○코로나19 이후 ‘보복적 소비’ 대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한국 기업들은 경쟁 관계에 있는 글로벌 기업보다 타격이 작았다. 자동차 업종이 대표적 사례다. 지난달 제너럴모터스(GM), 르노, 포드, BMW 등 주요 글로벌 자동차 업체 공장 가동률은 10%에 머물렀다. 60%대에서 방어에 성공한 현대·기아자동차와 대조적이다. 선제적인 방역과 공급망 관리가 셧다운을 최소화한 배경이다. 자동차만이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3월 국내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코로나19 이전과 비슷한 수준인 74.1%에 이른다.
국내 기업들은 피해를 최소화하며 쌓은 여력을 기반으로 코로나19 이후 벌어질 ‘보복적 소비’를 대비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멈춰선 소비가 되살아나는 시점에 마케팅 화력을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주요 기업은 미국과 유럽의 소비시장이 기지개를 켜는 시점을 이르면 올해 말 블랙프라이데이, 늦으면 내년 초로 예측하고 있다. 한 전자업체 전략 담당 임원은 “일부 조직을 떼어내 ‘포스트 코로나’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며 “경쟁 업체보다 발 빠르게 물량 공세에 나서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시장조사기관들도 ‘어둠의 터널이 끝난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올해는 상반기 소비 위축으로 시장 규모 축소가 불가피하지만 내년에 대호황이 올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옴디아는 지난달 24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내년 디스플레이 수요가 올해보다 9.1%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코로나19로 올해 못 판 디스플레이 제품이 내년에 한꺼번에 팔린다는 얘기다. D램 반도체 시장도 급성장할 전망이다. 가트너는 내년 D램 시장을 올해보다 38.2% 늘어난 839억달러 규모로 내다봤다.
○TV와 건강 가전, 자동차 등에 기대
대규모 투자도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소비시장이 되살아날 시점에 최신 제품을 쏟아내려면 생산라인 증설, 연구개발(R&D) 등의 작업이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LG디스플레이는 3분기부터 중국 광저우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공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한다. OLED TV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에 대비한 움직임이다. 삼성전자도 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연말부터 D램 크기를 줄일 수 있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세계 최초로 D램 공정에 적용할 예정이다.
기업들은 TV와 건강 가전, 자동차 등이 ‘포스트 코로나’ 시장을 개척할 선봉장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TV는 70인치가 넘는 대형 제품이 주력이다. 코로나19로 집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대화면 TV’의 욕구가 커지고 있어서다. 삼성전자는 ‘QLED 8K’ 초대형 제품을 다양화할 예정이다. 또 차세대 제품인 대형 ‘마이크로 LED’ 모델도 늘릴 방침이다.
주요 기업이 코로나19에 위축되지 않고 공격적인 경영 행보를 이어가는 것은 과거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위기를 잘 넘긴 기업들이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는 역사가 되풀이됐다는 얘기다. 삼성전자는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3조원대에 불과하던 시가총액이 3년 만에 여섯 배 이상 늘었다. 현대차는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미국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현대차를 구입한 뒤 1년 이내에 실직하면 차를 반납하라는 광고를 내보내며 꽁꽁 얼어붙은 미국 소비자 마음을 돌렸다. 2008년 현대차와 기아차를 합해 4.8%에 불과했던 미국 시장 점유율은 3년 만인 2011년 8.9%로 껑충 뛰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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