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뜨락에서의 날들

입력 2020-05-19 17:21   수정 2020-05-20 00:12

청소년 시기 내가 가장 좋아했던 외국 작가는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헤르만 헤세다. 특히 헤르만 헤세의 삶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헤르만 헤세는 고국 독일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살기도 했고,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도 많이 했지만 철저히 자기화된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여러 가지 특징 중에서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의 우편물을 직접 관리했다는 얘기가 참 좋았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온 독자들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쓰고 우편물 개봉은 물론 우체국으로 우편물을 부치러 가거나 우편물을 찾아올 때도 다른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손수레를 끌면서 해결했다는 대목이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전 생애를 두고 정원 가꾸기를 열심히 했다는 점도 좋았다.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부터 그런 꿈을 꿨는지 모른다. 그런데 용케 나이 들어서 풀꽃문학관을 설립하게 되고 문학관 주변을 정원으로 꾸며 여러 가지 꽃나무를 가꾸며 살게 됐다.

이건 참 고마운 축복이 아닐 수 없겠다. 꽃과 나무가 늘어나고 무성하게 자라자 이제는 그 꽃과 나무들이 나의 식구들이 됐다. 문학관에 볼일을 보러 가서도 제일 먼저 찾아 인사 나누는 대상이 꽃과 나무들이다. 그동안 잘 있었니? 여전하지? 그래 나도 여전하단다.

문학관 정원에서 풀을 매고 호미질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간다. 하나의 몰입 상태다. 누군가 이런 나에게로 와서 들려준 말이 있다. “노년의 삶 가운데 가장 좋은 삶은 정원에서 풀과 나무를 가꾸는 삶이랍니다.” 글쎄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그런 것 같다.

풀과 나무들은 정직하다. 말을 할 줄 모르지만 자신의 몸으로 의사 표현을 한다. 그들의 말 없는 말을 엿듣는 것이 매우 즐겁고도 행복하다. 풀과 나무들 사이에 있다 보면 나 자신이 맑아지는 마음을 느낀다. 풀과 나무가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뿐이랴. 그동안 사람들한테서 받은 온갖 시련과 상처까지 저절로 치유됨을 느낀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더 많은 것을 내려놓으세요. 버릴 것이 있으면 충분히 버리세요.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주는 사람이 되세요. 순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잃지 마세요. 풀과 나무들은 그렇게 나에게 보다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풀꽃문학관은 공주시청이 소유한 재산이다. 비록 나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노년에 꽃과 나무들을 가꾸고 그들과 친할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된 것에 대해 감사한다. 앞으로 보다 많은 나날, 이런 즐거움과 축복이 나에게서 떠나가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나무들아 꽃들아, 고맙구나. 나도 너희들 곁에서 오래 떠나지 않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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