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후로 연락이 끊겨 이혼하게 된 남편 A씨가 사망한 날 그의 계좌에 있던 예금 수억원이 사라졌다. 계좌를 확인한 아내 B씨는 망연자실했다. 예금을 빼간 사람이 남편의 어머니인 80대 노모 C씨였기 때문이다. B씨는 C씨를 고소했고 재판부는 '집행유예' 처벌을 내렸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원지법 형사11부(김미경 부장판사)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등 혐의로 기소된 C씨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C씨가 정당한 인출 권한 없이 은행을 속여 A씨 자녀에게 상속돼야 할 재산을 가져간 것으로 보고 그를 재판에 넘겼다. 반면 C씨 측은 "숨진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C씨는 2018년 8월8일 오전 9시27분께 딸과 함께 경기도의 한 은행을 찾아 아들인 숨진 A씨 명의의 예금거래 신청서를 위조해 은행 직원에게 제출, 딸의 계좌로 4억4500만원을 이체하는 등 같은 달 28일까지 총 6회에 걸쳐 5억4800여만원을 편취했다.
C씨의 첫 범행 시점은 A씨가 사망한 지 불과 8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뒤였다. 검찰은 C씨가 숨진 아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서류를 꾸미는 수법으로 은행을 속여 돈을 빼냈다고 판단했다. A씨의 사망에 따라 상속인인 초등학생 자녀에게 가야 할 재산을 B씨가 가로챈 셈이다.
재판에 넘겨진 C씨는 배심원의 판단을 받아보겠다며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검찰과 변호인은 전날 오전 10시30분부터 이날 0시30분까지 14시간 동안 치열한 유무죄 공방을 벌였다.
검찰과 변호인 등에 따르면 C씨의 아들 A씨와 B씨는 2008년 결혼했다. 하지만 9년여만인 2017년 12월 이혼 위기를 맞았다. A씨가 B씨와 자녀를 남겨둔 채 가출하면서다.
B씨는 집을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2018 4월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이혼은 그해 6월17일 성립됐다. A씨는 이혼 성립 12일 전인 같은해 6월5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 없이 2개월 간 투병하다 8월8일 새벽 숨졌다.
검찰은 "C씨는 아들 명의 예금청구서를 거짓 작성해 권한이 없는 예금을 딸에게 이체했다"며 "A씨 자녀에게 상속돼야 할 재산을 임의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A씨와 자녀는 물려받지도 못한 재산에 대한 거액의 상속세도 부과받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C씨 측은 6차례에 걸쳐 이체·인출한 돈을 모두 A씨의 개인채무 변제, 장례비 및 병원비, 사업장 인건비와 임대료, 공사대금 채무 변제, 사업장 전기료 등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C씨가 얻은 이익은 없다고 주장했다.
C씨 변호인은 "C씨는 아들이 생전 부족한 경제 관념으로 인해 사업실패를 하고 손실을 보자 오래전부터 대신해서 재산관리를 해왔다"며 "아들이 사망하기 전 수억 원의 채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재산관리를 위임받은 피고인이 대신 일 처리를 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 어떤 피해자에게도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고, 피고인에게 불법영득의사(본인 또는 제삼자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보관하는 타인의 재물을 자기 소유인 것처럼 처분하는 것)가 없었으며, 사회상규에 위배되는 행위로 볼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C씨도 최후 진술을 통해 "저를 위해 돈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아들을 떠나보낸 뒤 이 사건 조사를 받고 법정에 서는 과정에서 아들이 떠올라 너무나 힘들었다"며 "아들의 빚을 정리하고 일 처리를 한 것이 법에 저촉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눈물을 쏟았다.
검찰은 최후의견에서 "예금청구서 위조 자체가 은행을 기망한 행위"이라며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수단이 불법한 경우에는 불법영득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편취 금액이 크고 피해 회복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초범인 점, 고령인 점, 아들인 A씨가 사망해 이 사건에 이르게 된 점 등을 고려했다"며 징역 2년을 구형했다.
양 측의 공방을 들은 국민 배심원 7명은 C씨의 사기,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 행사 혐의에 대해 만장일치 유죄 평결했다. 양형 의견은 징역 1년6월(4명), 징역 2년(1명), 징역 2년6월(1명),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1명)을 제시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숨진 아들의 재산을 관리한 어머니라고 해도 아들의 사망 사실을 숨기고 예금을 인출한 것은 법질서 전체의 정신이나 윤리, 사회통념에 비춰 허용되는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또 "이 사건 피해 금액은 5억원이 넘고 은행에 피해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면서도 "피고인이 아들의 채무를 변제해 실질적인 이익을 얻었다고 보기 어렵고, 이후 민사소송을 통해 피해 보상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양형 사유를 밝혔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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