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원대 개발 계획 줄줄이 포기
지난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비전 2030’에 따른 개발 계획을 80억달러(약 9조8400억원) 줄인다고 발표했다. 비전 2030은 사우디가 경제 수입원 다각화를 위해 추진해온 프로젝트다. 수도 리야드의 북서쪽 사막 한복판에 사우디판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조성하는 개발안이 포함돼 있다. 사우디는 또 부가가치세율을 종전(5%) 대비 세 배 수준인 15%로 높이고, 2년 전부터 국민에게 지급했던 생계비 수당을 다음달부터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
또 다른 산유국인 오만은 지난 17일 에너지부문 신사업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석유회사 쉘과 함께 출범시킨 태양광발전 기업 글라스포인트 솔라를 청산하기로 했다. 태양열을 활용해 석유 제품 제조 과정을 혁신하겠다던 6억달러짜리 프로젝트 기업이다. 같은 날 오만은 신규 공무원 급여를 최대 20%, 정부 기관의 이사 급여를 50% 삭감하고 30년 이상 근속한 공무원을 전부 퇴직시킨다고 발표했다.
카타르는 국가 재정이 투입되는 총 82억달러 규모의 프로젝트 계약을 늦추기로 했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는 정부 기관의 신규 채용을 모두 중단했다. 아부다비 에너지부 역시 태양광발전소 입찰 공고를 보류했다. 이라크는 공무원 지원금을 대거 삭감하고 나섰다. 군비 삭감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게 현지 언론의 보도다.
원유 의존 절대적…대규모 재정 적자
중동 산유국들이 일제히 긴축 체제로 전환한 것은 저유가 추세가 길어지고 있어서다. 주요 산유국의 원유 등 에너지산업 의존도는 절대적이다. 이라크 등 제조업 기반이 약한 나라들은 정부 예산의 80~90%를 원유 수출에 기대고 있다. 경제 분석기관들이 중동 국가의 재정 상태를 평가할 때 원유 가격 수준인 ‘재정균형 유가’를 집중적으로 따져보는 배경이다.
대부분 중동 국가는 국제 유가가 배럴당 60~70달러 선은 돼야 겨우 적자를 면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사우디의 재정균형 유가는 배럴당 76.1달러다. UAE는 이보다 조금 낮은 69.1달러, 이라크는 60.4달러, 카타르는 53달러다. 경제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바레인과 오만은 재정균형 유가가 각각 95.6달러, 86.8달러로 높다.
산유국들은 지난 3~4월 유가 대폭락 시기에 이미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중동의 맏형 격인 사우디는 올 1분기에만 90억달러 규모의 재정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나라의 외환보유액은 20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감소하면서 2011년 이후 최저치(4월 말 기준 4725억달러)를 기록 중이다.
반토막 난 유가 “회복도 요원”
현지 언론은 중동 국가들이 추가적인 긴축 조치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 원유 수요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 수준을 회복하려면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란 전망에서다. 사우디와 카타르, UAE 등이 지난달 수십억달러 규모 국채를 긴급 발행해 현금을 비축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중동 산유국이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지난 14일 세계 원유 시장이 올해 말까지 코로나19 이전 수요를 회복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올해 원유 수요는 하루 평균 9059만 배럴로, 작년(9967만 배럴) 대비 9.1% 적을 것이란 예측이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는 올해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35달러 선을 횡보할 경우 중동국 대부분이 국내총생산(GDP)의 15~25%만큼 재정 적자를 볼 것으로 예상했다. 이 때문에 중동 국가들이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경기 부양에 적극 나서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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