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가 영국해외시민여권(BNO)을 소지한 31만여명의 홍콩 주민들에게 영국 시민권을 제공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중국이 홍콩 시민들과 국제사회의 반발에도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통과를 강행한 것에 대한 강력한 후속 대책이다. 영국 시민권 제공 여부가 중국과 영국 간 첨예한 외교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도미닉 라브 영국 외무장관은 28일(현지시간) “중국이 홍콩에 보안법을 적용하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BNO를 소지한 홍콩 주민들에 대한 비자 권리를 연장하고 영국 시민권 취득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정부가 BNO 소지자에게 시민권을 제공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라브 장관은 “현행 최대 6개월인 BNO 소지자의 영국 체류기간을 12개월로 연장할 계획”이라며 “이는 영국 시민권을 얻기 위한 길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중국은 국제사회의 반발에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전체회의 폐막일인 28일 홍콩보안법 표결을 강행해 통과시켰다. 중국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1984년 체결된 홍콩반환협정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게 영국 정부의 설명이다. 영국 총리실도 이날 공식성명을 통해 “홍콩보안법 관한 중국 입법에 큰 우려를 갖고 있다”며 “이 법이 일국양제 원칙을 약화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 왔다”고 밝혔다.
홍콩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1841년부터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영국과 중국은 1984년 체결한 홍콩반환협정을 통해 1997년 중국 반환 이후로도 50년 동안 홍콩이 현행 체계를 기본적으로 유지토록 하는 등 ‘일국양제’ 기본 정신을 담고 있다.
홍콩 시민들은 민주화시위에서 영국 국기인 유니온 잭과 BNO를 흔들며 영국 정부에 시민권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2014년 ‘우산시위’를 시작으로 잇따라 일어났던 홍콩 민주화시위 과정에서 영국 시민권 제공에 대한 입장표명을 자제해 왔다. 영국 정부가 홍콩 주민들에게 시민권을 제공하는 건 중국 정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BNO(British National Overseas)는 영국 정부가 해외 자국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발급하는 해외시민여권이다. 영국 정부는 1987년부터 홍콩 시민들을 대상으로 BNO 발급을 시작했다. 1980년대 홍콩을 비롯한 해외에 있는 영국령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BDTC(영국 해외영토여권·British Dependent Territory Citizen) 여권만 발급받으면 됐다. 문제는 홍콩이 1997년 7월1월 중국에 주권 반환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 정부는 홍콩 주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반환 시점인 1997년 7월1일 이전 태어난 홍콩 주민들에게 BNO를 발급해 줬다. 이 여권을 소지하면 준(準)영국인으로 간주돼 다른 여권에 비해 영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 6개월을 이상 거주하거나 일할 권리는 없다. 사실상 반쪽짜리 영국 시민권인 셈이다.
지난해 말까지 BNO를 발급받은 홍콩 시민은 340만여명에 달한다. 발급 건수로만 보면 전체 홍콩 시민(750만여명)의 절반에 육박한다. 그러나 지난해 말 기준으로 실제로 유효한 BNO를 보유한 홍콩 시민은 31만5000명뿐이다. BNO는 10년마다 갱신해야 효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초기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홍콩인들은 1997년 7월부터 중국 정부가 공식 발급하는 홍콩특별행정구(SAR) 여권과 함께 BNO 여권을 동시 소지했다. 그러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후 BNO는 SAR 여권에 비해 인기가 시들어졌다.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해외 여행시 BNO보다 SAR 여권을 사용하는 홍콩 시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SAR 여권을 소지하면 세계 각국에 있는 중국 공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본격적인 간섭과 함께 홍콩 정세가 불안해지자 2010년대 중반부터 BNO를 갱신하는 홍콩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홍콩 현지 언론에 따르면 2000년대 후반 한 해 평균 1만건에도 미치지 못했던 BNO 갱신건수는 2015년엔 3만건에 육박했다. 홍콩 경제·금융계를 장악하고 있는 홍콩인들의 대부분이 만약을 대비해 BNO을 갱신하고 있다는 것이 현지 언론의 설명이다.
홍콩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영국 정부의 시민권 제공계획에 대해 중국 정부는 이날 공식 입장을 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홍콩 민주화 시위 당시 영국 정치권 일각에서 시민권 제공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자 중국 정부는 강력 반발했다. 당시 류 샤오밍 영국 주재 중국대사는 “영국 정치인들이 여전히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 정부도 영국 외교부에 홍콩 시위에 대한 간섭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런던=강경민 특파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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