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칠 대로 지친, 수 백 명의 당나라 군인들이 3일 동안 고산을 진군한 끝에 마침내 힌두쿠시(興都庫什) 산맥의 탄구령(坦駒嶺) 정상에 도달했다. 고선지 장군의 군대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계곡을 내려가 현재의 키르키트인 소발률국(小勃律國)의 수도를 점령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작전이었다.
당나라를 압박한 토번과 사라센 제국
당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국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숙적인 투르크(돌궐)은 망했다가 다시 성장하는 중이었고, 서남쪽의 고산 지대에서는 토번(현 티베트)이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당태종은 토번의 임금인 송챈감포(松贊岡保)에게 딸인 문성공주를 왕비로 보낼 정도였다. 울면서 멀고도 먼 티베트까지 시집을 간 그녀의 애달픈 사연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토번은 이 무렵에는 더욱 막강해져 당나라의 장안을 위협하고, 서북쪽으로 진출해 파미르 고원의 산악 지대와 수십 개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그러면 당나라는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약화될 뿐만 아니라, 동로마까지 이어지는 물류망이 위험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받는 상황이었다.
한편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왔다. 사라센 제국과 토번은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당나라는 토번과 전쟁을 불사했다. 3번이나 군대를 파견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은 고선지를 장군을 선택해 토번의 배후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윤명철, 《유라시아 세계와 한민족》).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 장군이 된 ‘고선지’
고선지는 누구일까. 668년 9월, 고구려는 항복을 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보장왕과 귀족들, 장군과 기술자 등 3만여 명을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현재 서안)으로 끌고 갔다. 또한 669년 4월에는 20만명에 달하는 고구려 사람들을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구실로 장쑤성·산둥성 등의 해안 지대와 내륙의 쓰촨성, 심지어는 사막지대인 간쑤성까지 끌고 가 황무지를 개척하게 만들고, 변방을 지키는 군인으로 삼았다.
그때 고구려 출신의 뛰어난 장수가 고사계였다.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실력을 쌓았는데, 고구려인의 후예답게 말 타기와 활쏘기에 매우 능했다. 지금 신장성 지역에서 전공을 세운 그는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유격 장군’이라는 직위에 올랐다. 이어 747년에는 안서부도호라는 직책으로 승진하고, 본영을 쿠차(龜慈)에서 더 서쪽인 투루판(吐魯蕃)으로 옮겼다. 그 곳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도시이고, 당나라의 태종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와중에 멸망시킨 고창국(高昌國)의 수도였다.
현종의 명을 받은 고선지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단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여 타클라마칸을 횡단했다. 그 속에는 용맹스러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평가되는 고구려 병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소설 서유기에서 묘사되듯 몽골의 고비사막과는 달리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다는 죽음의 사막이다. 무려 35일을 횡단한 끝에 서쪽 끝의 카쉬카르(현 신장성 카스)에 도착했다. 카쉬카르는 지금도 위구르인들의 독립 저항이 간간이 발생할 만큼 중국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서 아시아의 동과 서, 남과 북의 길이 만나는 십자로 같은 곳이다. 고선지 장군은 다시 남서쪽으로 행군을 계속해서 파미르 고원에 다다랐다.
‘총령(蔥嶺)’으로 불리는 파미르 고원은 평균 높이가 5000m가 넘는다. 접근하고, 우회하는 길도 협곡과 급한 물살로 이뤄졌고, 정상에서는 고산병이 심각하고, 큰 생명체들은 살 수 없는 거친 환경이다. 지금도 행군하기 힘든 지역을 건너 무려 100일 동안을 행군한 끝에 오식닉국(현재 시그난 지방)을 급습했다. 연운보 전투를 벌여 적군 5000명을 죽이고, 1000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1000마리의 말과 무기 등을 노획했다.
그런데 그는 지친 병사들을 남겨둔 채 3일 동안 더 고산을 진군한 끝에 마침내 토번의 거점인 탄구령 정상에 도달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힌두쿠시(興都庫什) 산맥을 마침내 넘은 것이다. 고선지 장군의 군대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계곡을 내려가 소발률국의 수도를 점령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실현시킨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작전이었다. 그는 72개의 소국들에게 항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재빠르게 다가오는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했다. 그의 명성과 고구려 부대의 강인함은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 때문에 승리자인 고선지의 행보는 그리 밝지 못했다.
사라센제국·오아시스 도시 연합군과 당이 격돌한 ‘탈라스 전투’
그 무렵에 이슬람교 신자인 아랍인들로 구성된 사라센제국은 더 강력하게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고 있었다. 고선지는 750년에 제 2차 원정에 나서 석국(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지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런데 오만한 당나라 정부는 고선지가 끌고 온 석국(석국, 현재 사마르칸트시)의 왕을 성문 앞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분노한 오아시스의 도시 국가들은 사라센제국과 연합군을 구성한 후에 당나라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고, 알타이 초원의 투르크도 이에 가세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다시금 고선지에게 7만의 군대를 주면서 전쟁을 지시했다.
751년 7월, 드디어 동 서양의 한가운데이면서, 중앙아시아의 사막 같은 평원에서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나라 군대와 사라센제국과 오아시스 도시, 일부 투르크 연합군이 대회전을 벌였다. 이를 역사에서는 ‘탈라스(Talas) 전투’라고 불렀다.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키르키스스탄에 걸쳐있는 메마른 평원의 탈라스는 유라시아 세계의 방향을 결정지은 대전장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언덕과 강물, 그리고 아이들이 뛰노는 조용한 시골 도시다. 두 차례의 대승리로 이름을 떨친 그였지만, 더 큰 이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고선지의 대부대는 전멸했고, 불과 수 천 명만이 살아남았으며, 그 또한 간신히 탈출했다.
사라센제국,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
탈라스 전투는 세계 역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중앙아시아는 원래가 투르크인의 땅이었고, 그 후 지금까지 그들과 연관이 깊다. 만약 당나라군이 승리했다면 당나라 문화와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로 파급되었을 것이고, 투르크는 영원히 쫓겨날 수도 있었다. 이 전투 이후에 동서의 세력들은 중앙아시아를 경계로 발전할 수 있었고, 중간 지대인 이 곳은 이슬람 문화권으로 변해버렸다. 탈레스 전투에서 붙잡힌 포로들 가운데 제지공들은 종이 제작 기술을 전달했고, 이 기술은 다시 이슬람 상선에 실려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전해졌다. 그 때 사라센으로 잡혀간 포로들 가운데 고구려인들이 포함돼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지배선,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장군》).
당나라에서 처형당한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
고선지는 패배한 장군의 신분으로 귀국했다가 몇 년 머문 후에 다시 전선으로 나갔다. 755년에 안록산이 난을 일으켰고,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낙양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전하던 고선지는 도중에 모함을 받아 처형당했다.
서양인들은 고선지라는 인물을 발굴해 높이 평가했다. 10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 헝가리 출신의 역사학자인 오렐 스타인은 고선지를 카르타고의 장군인 한니발,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을 뛰어넘는 위대한 군인으로 평가했다. 중국 측 사료의 기록처럼 유민 2세대인 그는 신조국과 황제에게 충성을 바쳐 기량을 발휘했다. 하지만 끝내는 패배자로서, 배반자로서 처형을 당했다. 그의 삶 속에서 고구려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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