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에 제출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 보고서에서 중국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 등 동맹국 및 우방국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한국의 신남방정책과의 공조 가능성도 언급했다. 또 탈(脫)중국 봉쇄를 목표로 한 경제블록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 구상에 한국의 동참을 희망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 하반기 열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한국, 호주 등을 초청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한편 중국은 한·중 간 산업 공급망의 안정화를 강조하고, 홍콩 국가보안법에 대해 한국 측의 이해와 지지를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미·중 양국 사이에서 명확한 입장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우리의 전략적 딜레마는 더욱 커질 것이다.
코로나19는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1일 현재 세계 누적 확진자 수는 600만 명을 넘어섰고, 누적 사망자 수는 37만 명을 웃돌았다. 가장 큰 문제는 코로나 사태가 언제 정상으로 회복될지, 정치·외교·경제·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코로나 사태로 세계화의 취약성이 부각되고 있다. 향후 탈세계화, 자국우선주의 및 지역주의의 대두 등 국제질서의 재편 움직임이 예상되는 이유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코로나 사태 이후의 새로운 국제협력 체제 및 질서 형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중국 경제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2019년 수출 25.1%, 수입 21.5%)를 줄여 글로벌가치사슬(GVC)을 다변화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그 대안으로 신남방국가와의 협력 강화를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선의의 파트너'로서 신뢰 쌓아야
신남방정책은 많은 성과를 이뤘으나 코로나 사태로 인한 대외환경 변화와 이에 따른 수요를 반영해 정책 목표 및 전략을 조속히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사람 중심의 평화와 상생의 파트너십 실현’이라는 신남방정책의 비전과 원칙을 견지하면서 기존 합의사항은 충실히 이행하되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협력, 특히 인간안보, 삶의 질 개선, 인적개발 사업 등 사람 중심 사업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코로나 사태 극복을 위해 가용 자산과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 보건·의료 협력을 최우선으로 추진해야 한다.
‘진정한 우정은 위기에서 더욱 빛난다’는 말처럼 신남방국가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원을 늘려야 한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수하르토 정권 몰락으로 인도네시아에 대혼란이 발생했을 때 외국 자본은 대거 인도네시아를 떠났지만 한국인들은 꿋꿋이 남아 위기를 함께 극복했다. 이에 대해 인도네시아는 한국이 어려울 때 도와준 진정한 친구라며 아직껏 고마워하고 있다. 반면 태국에서는 외환위기 때 태국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우리 금융회사들이 철수해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긴 사례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원칙 유지하고 전략적 가치 높여야
한국은 미·중·일 등 강대국에 비해 신남방국가들과 교류의 역사가 길지 않고, 경제협력 규모가 차이 나 신남방정책 추진에 한계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주고 있다. 지역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 중견국가로서 한국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수요가 증대된 비대면 경제, 4차 산업혁명 분야와 감염병, 자연재해 및 환경 분야에 강점이 있는 선의의 파트너로 인식된다. 특히 우리 방역모델 및 보건역량에 대한 국제사회의 높은 신뢰와 평가를 바탕으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좋은 기회를 맞고 있다. 우리 정부의 정치적 의지와 진정성, 국민적 이해와 지지가 뒷받침된다면 ‘중견국 외교’ 신남방정책이 한국의 대표 대외정책으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국제정치학자 이언 브레머는 “세계적 리더십이 부재한 ‘G0’ 시대에 누가 성공 또는 실패 국가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피벗국가(Pivot State)’에서 답을 찾고 있다. 어느 한쪽 진영에 치우치기보다 다양한 국가와 유연한 협력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관계에서 명확한 원칙을 유지하면서 주요 협력 파트너에 정치·경제·전략적으로 중요한 상대가 돼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한·아세안 대화관계 30주년 기념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마치면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아니라 강대국을 서로 이어주며 평화와 번영을 만드는 ‘교량국가’로서의 한국의 꿈을 피력한 바 있다. 사람 중심의 평화와 상생의 파트너십 구현을 목표로 한 신남방정책을 바탕으로 새로운 한국의 외교를 펼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김영선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前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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