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콘(신보수주의자)으로 유명한 미국의 딕 체니 전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부 장관이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69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 설치된 경제기회국에서 가족부조계획이라는 제도를 설계했다. 자녀가 있는 모든 가구에 연 1600달러(현재 가치 기준 1만1000달러, 약 1340만원)를 지급하는 것이 골자다. ‘빈곤과의 전쟁’을 벌이던 1960년대 미국은 기본소득 지급을 포함해 상상 가능한 모든 대책을 두고 논의했다. 하지만 “기본소득 도입이 근로의욕을 꺾을 수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에 대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미국은 이 때문에 근로장려세제(EITC)를 대안으로 도입하고 이후 50여 년간 기본소득 논의를 중단했다.
“기본소득은 근로의욕 감퇴시킨다”
가족부조계획은 실제 닉슨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돼 1972년 하원을 통과했다. 관련 여론조사에서도 미국 국민의 65%가 제도 도입에 찬성했다. 하지만 상원에서 부결되며 최종 무산됐다. “개인의 근로 노력과 연계되지 않은 지원은 도덕적 가치를 파괴하며 결국 사회를 붕괴시킬 것” “빈곤을 벗어날 수단은 현금 지원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결과다.
비슷한 시기에 통화주의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한 ‘음의 소득세’ 관련 논의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정부가 최저소득보장 수준을 설정하고 여기에 미달하는 금액의 일정 부분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4인 가구 기준 최저소득 보장선이 연 3000만원이고 부의 소득세율이 50%일 때, 2000만원의 근로소득을 올린 가정이 있다고 하자. 정부는 보장선과의 차액 1000만원에 소득세율 50%를 곱한 500만원을 지급하게 된다. 프리드먼의 주장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아 미국 정부가 시범사업까지 했다.
하지만 이 역시 근로의욕 감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참여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지역 및 인종에 따라 3~8%까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를 하는 가구만을 대상으로 소득이 적을 경우 근로장려금을 지급하는 EITC를 1975년 도입하는 쪽으로 미국 정부가 선회한 이유다. 이후 미국 정부는 공화당과 민주당을 막론하고 EITC 대상을 확대하고 지급액을 늘리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했다. 영국과 프랑스, 캐나다에 이어 2009년부터 한국에도 도입됐다.
4차 산업혁명으로 재점화됐지만…
기본소득 도입에 따른 근로의욕 감소는 여러 연구에서 확인되고 있다. 중위소득 기준 50% 수준의 기본소득을 만 18세 이상 전체에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했던 스페인식 기본소득 모델이 대표적이다. 2017년 한국경제연구원은 이 제도가 한국에 도입되면 비경제활동인구가 151만7178명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생계형 영세자영업자 상당수가 일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식 음의 소득세가 도입되더라도 비경제활동인구는 44만2511명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노동투입이 감소하면서 국내총생산(GDP) 역시 줄어들어 스페인식 기본소득은 -2.40%, 부의 소득세는 -0.18% GDP 감소 영향이 있을 것으로 추산됐다.
잠들어 있던 미국의 기본소득 논의는 실리콘밸리에서 깨어나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 잭 도시 트위터 창업자 등은 “인공지능(AI)에 따른 일자리 감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본소득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는 만큼 기본소득의 취약점으로 지적된 근로의욕 감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해서는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국민 1인당 월 30만원을 지급할 경우 187조원, 40만원을 지급하면 249조원이 필요하다. 512조원인 올해 정부 예산(추경 제외)의 절반에 육박한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기본소득을 섣불리 도입하면 그리스와 같은 재정 파탄을 면하기 어렵다”며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 총량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도 아직은 확인이 어려운 만큼 이를 전제로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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