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상상력 없는 '문재인 뉴딜'

입력 2020-06-04 18:00   수정 2020-06-05 00:16

“정책적 상상력에 어떤 제한도 두지 말라.” 문재인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경제위기 타개를 위해 정부에 주문했던 말이다. 베일을 벗은 ‘한국판 뉴딜’은 문 대통령의 주문에 걸맞은 것일까.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이 포함된 ‘한국판 뉴딜’, 이른바 ‘문재인 뉴딜’은 대한민국이 세계의 표준이 될 수 있는 경제정책”이라고 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다는 것인지,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게 납득을 좀 시켜줬으면 좋겠다.

정부가 내놓은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은 출발부터 동의할 수 없었다. ‘작년 말부터 소비·투자 등 실물지표가 전반적으로 개선되면서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 형성. 국내외 기관들은 우리 경제의 성장세 개선을 전망.’ 코로나 이전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진단이다. 오로지 코로나 때문에 완전히 다른 양상이 됐다는 인식이다. 정책 실패로, 구조적 문제로 경제가 저성장 기조에 봉착했던 상황을 정부는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그래도 ‘혹시나’ 했다. 뚜껑이 열린 ‘한국판 뉴딜’은, 정부는 기존의 관성과 ‘경로 의존성’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는 ‘올드딜(old deal)’을 거듭 확인시켜주고 있다. 5세대(5G) 통신은 디지털 뉴딜로, 탈(脫)원전의 대안이라는 신재생에너지는 그린 뉴딜로 재포장됐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기존의 부처 사업들이 대거 예산을 늘리며 치고 들어왔다. ‘숫자의 마술’이 따로 없다. 정부가 인프라 투자를 주도하면 민간부문에서 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뒤따를 것이라는 낡은 일차함수도 그대로다. 사업도 방식도 하나같이 ‘추격형 경제’를 따르면서 정부는 뭘 갖고 ‘선도형 경제’를 위한 ‘한국판 뉴딜’이라고 우기는지 알 수가 없다.

정부의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그나마 기대를 한 것은 ‘대대적 투자 활성화’와 ‘산업·경제구조의 과감한 혁신’이었다. 허망하게도 이 또한 ‘역시나’로 끝나고 말았다. ‘대대적’이란 수식어가 붙었길래 기업 투자에 대한 파격적인 세액공제 영구화 조치 같은 게 나올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벤처투자에 대기업 자본의 최대한 활용을 말하면서 정작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의 제한적 허용을 검토해 보겠다는 것은, ‘과감한 혁신’과는 동떨어진 얘기다. ‘고강도’ 규제혁신은 기존의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이었고, 정부·공공·노동분야 구조혁신의 ‘지속’은 ‘중단’의 오타로 보일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가면 ‘문재인 뉴딜’은 가뜩이나 의심받고 있는 재정지출의 승수효과가 더욱 떨어질 게 뻔하다. 기업을 옥죄는 여당의 총선 공약이 속속 입법으로 현실화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문 대통령은 “추경에 담은 ‘한국판 뉴딜’은 시작일 뿐이다. 7월 종합계획에는 큰 그림과 구상을 담겠다”고 했다. 한 달을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이쯤에서 문 대통령이 정부에 주문을 다시 내는 게 좋겠다. “정책적 상상력에 어떤 제한도 두지 말라”가 아니라 “민간의 상상력에 어떤 제한도 두지 말라”고 말이다. 애당초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아니 상상력을 발휘하면 사고 난다고 여기는 정부에 상상력을 요구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상상력은 시장에서 나온다. 정부와 달리 민간은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집권 여당은 ‘한국판 뉴딜’을 ‘문재인 뉴딜’로 부르기 시작했다. 당면한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긴급한 재정지출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한 뉴딜은 다른 얘기다. 코로나 이전 한국 경제가 안고 있던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와도 소용이 없다.

지금이라도 상상력이 빈약한 정부 주도 ‘올드딜’이 아니라 상상력이 넘치는 민간주도 ‘뉴딜’로 가야 한다. 매너리즘에 빠진 재정지출이 아니라 대대적 규제개혁과 과감한 감세로 민간을 뛰게 하는 ‘문재인 뉴딜’을 보고 싶다.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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