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주민이 공공을 활용한다면

입력 2020-06-08 18:04   수정 2020-06-30 09:27

전공 분야가 도시계획과 부동산정책이다 보니 공공 개입의 정당성과 개입 정도에 항상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학문 영역을 넘어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가르는 잣대가 돼왔다. 시장실패론과 정부실패론, 복지국가와 민영화, 큰 정부와 작은 정부 논쟁의 주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공의 역할과 개입 정도는 구체적인 정책 현장에서 어떤 변화를 유도할 것인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주어진 문제와 제도를 분석해서 가장 효과적인 사업 추진 방식과 주체를 고안해내고 실행하도록 제도화하면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공공의 역할은 이념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실행 모델의 문제가 된다.

도시와 지역의 현장에는 오도 가도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새로운 정책실행 모델을 찾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한 노후주택단지는 건축물 정밀 안전진단 E등급으로 안전에 심각한 위험이 있는데 수익성이 없어서 어떤 민간기업도 재건축사업에 나서지 않는다. 또 다른 지역엔 노후주택과 쪽방이 밀집돼 주거상태가 열악하지만 권리관계가 복잡해서 어떤 개발사업도 추진할 수가 없다.

그동안 도시재생과 마을 만들기, 생태보전, 농·산·어촌 등의 현장에서는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와 공동체적 관리를 통한 해법이 강조돼왔다. 이윤 극대화의 논리와 관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적 해법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시장과 공공주체가 아닌,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같은 제3의 주체에도 많은 기대를 했다.

지역공동체적 해법에 대한 신뢰는 일찍부터 여성 최초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의 탁월한 안목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자발적인 공동체를 통한 공유자원 관리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스트롬은 전 세계를 뒤져 목장과 관개수로, 어장 관리 등의 분야에서 10여 개의 성공 사례를 찾아 소개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자발성과 공동체적 해법에만 과도하게 의존하느라 너무 긴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현장을 자주 본다. 언론과 연구논문에서 성공 사례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불량, 혼잡, 빈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다기보다 참여 과정과 공동체 운영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경향이 있다.

공공기관을 공동체가 통제하고 활용할 수 있다면 효과적인 정책실행 모델이 될 수 있다. 최근 정부와 서울시는 오도 가도 못하는 위험건축물 재건축사업과 영등포 쪽방정비사업의 해법으로 공공참여형 정비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주민과 각종 지원단체의 동의 및 참여를 전제로 공공기관을 활용하는 정책실행 모델을 찾아낸 것이다.

반드시 해결해야 하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여러 주체가 참여해 상황에 맞는 실행 모델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사회환경 변화에 맞는 공공의 정책실행 모델이자 비즈니스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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