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경영권 부정승계 의혹’을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제시한 190자 분량의 기각사유가 ‘해석 논쟁’에 휩싸였다. 검찰이 이 부회장에게 적용한 자본시장법 위반과 외부감사법 위반 등 ‘범죄혐의’에 대해 법원이 소명됐다고 판단했는지가 쟁점이다. 이 부회장 변호인단은 “기본적 사실관계가 아닌 범죄혐의는 소명되지 않았다는 취지”라고 했다. 검찰은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 등이 없어 불구속일 뿐 범죄혐의는 기본적으로 소명됐다”는 입장이다.
검찰과 변호인, 각기 정반대 해석
원정숙 서울중앙지방법원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9일 새벽 2시께 이 부회장과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 김종중 전 미래전략실 전략팀장(사장) 등 3명의 구속영장을 모두 기각했다. 원 부장판사는 “기본적 사실관계는 소명됐고, 검찰은 이미 상당 정도의 증거를 확보했다”면서도 “불구속 재판의 원칙에 반해 피의자들을 구속할 필요성 및 상당성에 관하여는 소명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피의자들의 책임 유무 및 정도는 재판 과정에서 충분한 공방과 심리를 걸쳐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한 검찰 관계자는 “법률가적 시각에서 봤을 땐, 법원이 사실관계 소명 및 증거가 이미 수집됐다는 점, 특히 재판의 필요성을 거론한 것 자체가 이미 기본적 범죄 혐의는 소명됐다고 본 것”이라고 주장했다. 형사소송법상 구속 사유인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 등이 없어 영장을 기각했을 뿐이라는 취지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도 “범죄혐의가 소명되지 않았다고 봤다면 법원이 이 점을 분명히 명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7월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의 구속영장이 기각됐을 당시 법원은 “주요 범죄 성부(성립 여부)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명시했다.
반면 이 부회장 변호인단은 이날 “(회사 합병 등) 기본적 사실관계 외에 피의자들의 책임 유무 등 범죄혐의가 소명되지 않았다는 취지”라는 정반대의 입장문을 내놨다. 사실관계와 범죄혐의는 엄연히 다르다는 얘기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사실관계가 소명됐다는 것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이 부회장에게 유리하게 이뤄졌다는 등 ‘팩트’에 관한 것일 뿐”이라며 “법원이 이를 인정하면서도 구속 상당성이 없다고 한 것은 이 같은 사실이 시세조종과 부정거래 등 범죄혐의에 해당한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이 범죄혐의가 소명됐다고 봤다면, 그 사실을 명시적으로 밝혔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법원은 지난해 12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범죄혐의는 소명됐으나, 증거를 인멸할 염려와 도망할 염려가 없다”는 사유를 들었다.
수사심의위 절차에 영향
법조계 일각에선 이 같은 해석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를 이 부회장이 소집을 신청한 검찰수사심의위원회(수사심의위) 절차가 조만간 진행되는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당장 11일 이 부회장 사건을 수사심의위로 넘길지를 결정할 부의심의위원회(부의심의위)가 열린다.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는 “법원이 이 부회장의 혐의 유무에 대해 어떻게 판단했는지가 시민들로 구성된 부의심의위 및 수사심의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혐의가 소명됐다고 본다면 검찰 측에, 그렇지 않다고 본다면 이 부회장 측에 유리한 결과가 나올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 변호인단은 이날 “향후 검찰수사심의 절차에서 엄정한 심의를 거쳐 수사 계속 및 기소 여부가 결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영장 기각을 동력 삼아 수사심의위로부터 불기소 의견을 최종적으로 받아내 아예 재판까지 연결되지 않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법조계에선 이번 사건의 혐의 유무를 결국 공판 과정에서 치열하게 다투게 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법원이 (이 부회장의) 범죄혐의가 소명되지 않았다고 봤다”는 이 부회장 측 해석이 받아들여져 수사심의위가 불기소 의견을 내더라도, 검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소를 강행할 것이란 시각이 많아서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영장심사에서는 범죄혐의가 ‘입증’됐는지가 아니라 ‘소명’되는지 여부만 간단히 검증하는 것”이라며 “원 부장판사도 ‘재판 과정에서 충분한 공방과 심리’의 필요성을 언급한 만큼 검찰이 기소를 결정하는 데 큰 부담이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인혁/안효주 기자 twopeop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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