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유명 행동주의 투자자인 칼 아이컨은 지난달 22일 렌터카 회사 허츠가 파산 신청을 한 뒤 보유하던 지분 39%를 주당 평균 0.72달러에 처분했다. 17억달러가 넘는 손실을 봤다. 허츠 주가는 0.44달러까지 폭락했다.
그 무렵 미국 시애틀에 사는 29세의 전기기사 코리 거버는 무료 주식거래 앱인 로빈후드를 통해 허츠 주식을 매수했다. “허츠 브랜드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허츠 주가는 지난 8일 115% 급등하는 등 주당 5.53달러까지 치솟았다. 아이컨이 빠져나간 뒤 481% 급등했다. 거버는 수천달러를 벌었다. 이렇게 지난주부터 로빈후드 앱을 이용해 허츠 주식을 사들인 사람만 9만6000명에 달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일(현지시간) “월가 베테랑들이 겁낼 때 개인 투자자들은 모험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나스닥종합지수는 이날 사상 처음으로 한때 10,000선을 돌파했다. 지난 3월 23일 바닥을 찍은 뒤 44% 상승했다. 폭발적인 상승 배경에 중앙은행(Fed)이 공급한 풍부한 유동성 외에도 증시에 새로 유입된 밀레니얼 세대(1982~2000년생) 개인 투자자들이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동학개미’와 비슷하다. 이들은 로빈후드 앱을 통해 주식을 거래한다고 해서 ‘로빈후드 투자자’라고 불린다.
나스닥은 이번 반등장에서 애플 아마존 구글(알파벳) 페이스북 테슬라 등 기술주 상승세를 바탕으로 다우지수, S&P500지수보다 가파르게 올랐다. 기술주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이폰을 쓰고 구글 검색을 해온 밀레니얼 세대가 좋아하는 주식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부상은 신설 계좌 수에서 드러난다. 로빈후드에는 지난 1분기 300만 개 계좌가 개설됐다. 1000만 명이 넘는 이 앱 사용자의 평균 연령은 31세다. 피델리티에는 3~5월 전년 동기보다 77% 증가한 120만 개 계좌가 만들어졌다. TD아메리트레이드에도 3월 한 달간 42만6000명이 새로 계좌를 열었다.
로빈후드 투자자들은 젊은 만큼 위험 선호 경향이 짙다. 허츠뿐 아니다. 역시 파산 신청을 한 백화점 체인 JC페니도 파산 전보다 주가가 167% 급등했고, 에너지 기업 와이팅페트롤리엄은 835%나 폭등했다. 파산설이 나돈 셰일업체 체서피크에너지는 지난 4일 14.05달러에서 8일 69.92달러로 급등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쇼크로 바닥을 기던 항공사 주가도 급등하고 있다. 또 한화가 투자해 유명해진 수소트럭 개발업체 니콜라도 로빈후드 투자자들의 매수로 폭등했다. 지난주 상장한 니콜라는 9일 시가총액이 300억달러에 달해 포드(288억달러)를 웃돈다.
밀레니얼 세대가 증시에 몰려든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마이크 오루크 존스트레이딩 수석전략가는 WSJ에 “(인터넷주가 급등했던) 2000년과 비슷한 점은 개인 투자자들이 이번 장을 놓칠 수 없는 천금 같은 기회로 보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밀레니얼 세대는 2008년 금융위기 때 폭락을 경험하지 못했다. 2010년 이후 증시가 10년간 오른 것만 기억하고 있다.
또 이들의 손엔 미 연방정부가 나눠준 수천달러의 ‘공돈’이 있다. 실업자에겐 주(州)정부의 실업급여 외에도 연방정부가 주당 600달러씩 추가로 지급한다. 이들 자금 중 상당액이 증시로 유입되고 있다. 작년 10월 로빈후드 앱 여파로 찰스슈왑, TD아메리트레이드, 이트레이드 등 미 증권사들이 수수료를 무료로 전환한 것도 젊은 신규 고객이 대거 증시에 유입된 계기로 평가된다.
이들의 ‘위험한’ 투자는 우려를 낳고 있다. 경제나 기업 펀더멘털을 감안하지 않고 게임처럼 투자한다는 것이다. 마켓인사이더에 따르면 이들은 트위터에서 ‘데이트레이더 데이비’로 알려진 스포츠 도박사 데이비드 포트노이 등을 추종한다. 그의 투자쇼에는 트위터에서 한 번에 수십만 명이 접속한다. 포트노이는 5월 초 워런 버핏이 항공주를 손절매했다고 밝힌 직후 항공주 매수를 권했다.
현재까지는 로빈후드 투자자들의 압승이다. 항공주가 급반등하자 버핏은 “감이 떨어졌다”는 말까지 듣고 있다. 큰 폭의 조정을 예상했던 유명 헤지펀드 투자자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지난 8일 “최근 몇 주 동안의 랠리는 나를 초라하게 한다”고 했다.
하지만 현 장세가 ‘닷컴버블’을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파산 신청을 한 허츠 등이 폭등한 것을 들어 ‘좀비 랠리’라고 비판했다. FT는 “파산보호 신청은 주식 소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라며 “좀비 팬들은 이 주식들이 당분간 증시에 머물 것으로 기대하지만 통상 좀비는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된다는 걸 기억해야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WSJ는 “1990년대 후반 소액투자자들은 닷컴 이름이 붙은 주식을 좇았고 2000년 봄 나스닥시장은 무너졌다”고 경고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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